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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박씨 Dec 25. 2021

살아 있는 Hallo를 원한다면

아버지의 치아 사진을 보니 기가 막혔다. 신경이 다 썩도록 아픔을 참았다니 말이다. 

"별로 안 아팠는데." 

크게 아프지 않았다고 하는 아버지의 말은 발치하지 않으려고 뒷걸음치시는 것으로만 들린다. 

독일에 있던 5년, 그리고 적응하는 시간 2년, 7년이란 시간 동안 방치된 아빠의 어금니가 안타깝다. 속상함을 느끼며 대기실 의자에 앉았다. 열린 대기실에 다른 할아버지 손님도 들어온다. 흘깃 할아버지를 보고 시선을 돌렸다. 속상한 마음으로 아버지의 치료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대기실에 여럿 들어왔다 나가는데 프런트의 간호사분이 손님에게 인사를 건네고 받을 뿐, 손님들끼리는 서로 못 본 척이다. 


독일의 병원 대기실에서 혼자 기다려본 적은 없다. 개인병원 수가 한국보다 턱 없이 부족하고, 의사들의 근무 시간이 짧아 병원 대기실은 환자가 많은 편이다. 정형외과처럼 노인 환자의 수가 많은 진료과의 경우 대기 시간이 기니, 대기실은 널찍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기실로 새 환자가 들어오면 다들 " Hallo."를 나지막이 말한다. 현지인처럼 살고 싶은 욕심을 가진 나로서는 독일인처럼 행동할 수 있는 기회다. 아파서 간 병원이니 처음에는 대기실의 분위기 파악을 못했다 몇 차례의 같은 병원 가는 일이 생기면서 대기실 문화도 관찰할 여유가 생겼다. 독일인들은 나에게 눈인사를 하거나 할로라는 인사를 건넨다. 좋았어. 누군가 들어오면 현지인인 양 할로를 해본다. 상대방도 나에게 가벼운 눈인사를 하거나 할로로 답해주면 그리 뿌듯할 수가 없다. 그들에겐 당연한 일이고, 나에겐 감사한 일이다.


거즈를 물은 어금니 쪽을 부여잡은 아버지와 치과를 나와 엘리베이터를 탄다. 3층에서 여자 2명이 타는데 " 으음." 하는 엉거주춤한 소리가 아버지에게서 흘러나온다. 1층인 줄로 알고 내리려고 하셨나 보다. 막 엘리베이터를 탄 두 여자는 시선을 돌리며 내릴 문 쪽으로 몸을 향한다. 한국에서 엘리베이터는 고요하다. 공간에 성과 이름을 붙여준다면 성은 어요, 이름은 색함일 것이다. 


고층 건물이 독일에는 드문데, 새로 지은 건물은 저층이어도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있다. S언니의 집은 리노베이션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건물로 실내 주차장도 있고, 엘리베이터도 있는 공동주택이다. S언니가 모닝커피를 마시러 오라 했다. 커피 한 잔의 아침 수다로는 모자라 커피 두 잔 어치의 수다와 언니가 구운 크루아상까지 더해졌다. 언니의 커피 초대에 나는 점심을 사야겠다고 나섰다. 엘리베이터에서 언니와 한국말 수다는 계속된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할아버지 한분이 타신다. 할아버지가 눈을 반짝이시며 " 할로"를 건네신다. 옅은 미소를 띠며 영어로 말을 거신다.

" 오늘 누구 생일이야? 아침 파티 같네."


 S언니의 아이들이 애들보다 서너 살 많아, 언니는 언니네 애들이 쓰던 책과 옷을 챙겨주곤 했다. 그날도 깨끗한 쇼핑백에 미리 챙겨둔 옷이 양손 가득이었다. 점심을 살 요량이라 나름 차려입고 왔다. 그래서 할아버지 눈에 아침부터 파티 같아 보였나 보다. 아니면, 할아버지는 엘리베이터 속 공기의 화기애애함을 느끼신 걸까? 한국말로 원 없이 수다를 떨고 나니 독일 날씨와는 딴판인 표정 가진 우리들이었을 것이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아래층 복도에서 여자들의 왁자지껄함을 듣으셨을는지도 모르겠다. 


" 누구 생일은 아니고, 비밀 모임 같은 거예요. 그래서 아침 일찍 집에서 모인 거랍니다. " 

영어가 술술 나온다. 할아버지도 농담을 알아듣고, 응수하신다.

" 비밀 모임. 재미있겠구먼. 하하." 

S언니의 아랫집 할아버지셨다. 할아버지는 S언니와 전에도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셨겠지. 언니네 공동주택의 가구수가 10여 개 정도니 하나인 한국인의 존재에 대해서는 알고 계시겠다. 전부터 언니와 할아버지는 눈인사와 간단한 할로를 주고받았을 터이다. 

 처음 보는 언니의 이웃 인대, 하고 싶은 위트를 담은 영어가 나에게서 나온다. S언니가 내리며 나에게 칭찬을 쏟아붓는다. 

" 영어 왜 이렇게 잘해?" 

언니 덕인데 언니는 모른다. 독일인들의 행동을 연구하듯 관찰하고, 공부하듯 복사해도 행복함이 없다면 뇌는 무엇도 출력해내지 못한다. 자기 긍정의 시간을 가진 뇌가 일도 잘하는 법이다. 일 잘하는 뇌의 경험치가 쌓일수록 자신감은 커지고, 자신감은 다시 현상을 즐겁게 바라보는 필터가 된다. 그야말로 좋은 순환이다. S언니의 엘리베이터의 이름은 자긍심 또는 고마움이다. 


 닥칠 1초 앞을 알지 못하는 삶이다. 그런 삶에서 같은 공간을 동시에 점유할 확률은 로또만큼이나 낮다. 우연들이 모여 남과 내가 같은 공간, 같은 시간에 있다.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길을 걷다 고개를 들어보면, 시간을 채우고 있는 우연함들이 눈에 들어온다. 같이 탄 엘리베이터, 함께 있는 대기실, 공유하고 있는 아파트, 옆에 있는 가족, 찰나에 왔다 사라지는 것들에 감사한다. 

명랑함을 담은 인사를 오늘부터는 건넬 수 있을 것 같다. 나지막한 'Hallo'를 기계처럼 잘 말했던 나다. 치과 대기실은 들어오는 손님들마다에게 인사를 하면 치과 간호사로 알 테니 힘들겠고, 엘리베이터 정도는 가능할 것 같다. 경비아저씨에게 건네던 인사도 톤을 높여야겠다. 살아있음에, 함께함에 고마움을 담은 인사를 해보는 거다. 한국에서는 마음을 담아서 해보리라. 유럽에 나갈 기회가 나에게 한번 더 생긴다면, 그땐 내게서 나온 할로에도 생명력이 어릴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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