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바르셀로나 스페인 광장 송년식
남편은 부산사람이다. 11월 초 그의 생일 무렵이 되어 시베리아 기단이 서울을 감싸면 열감기를 앓는다. 어느 구정도 시댁이 있는 해운대는 춥지 않다. 어린 기억 속 구정은 시리고 추웠다. 서울에 친가와 외가가 모두 있는 나에게 구정이란 겨울의 절정인데, 결혼한 후에는 기억이 바뀌었다. 따스한 바닷바람이 해운대 해안 가득이다. 남편에게 독일의 겨울은 나에게 보다 혹독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첫 스페인 여행을 했던 2016년 크리스마스부터 그는 스페인과 사랑에 빠졌다. 마침 20년 전 배낭여행 루트에서 스페인만 쏙 빠져있었고, 그 사이 한국서는 스페인 열풍이 불어대어 스페인은 한번 이상은 가리라 생각했었다. 5년 유럽에 있는 동안 스페인은 4번이나 가게 된다. 다양한 방법으로 여러 도시들을 방문했는데 마치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 김치나 쌀밥 마냥 스페인은 질리지 않는다. 빠에야나 추로스를 거듭 먹을 때처럼 전생, 후생 어디쯤엔 여기 사람이었나 싶은 기분이 든다. 남편에겐 더 그랬던 것 같다. 4번이나 방문을 하였으니 에피소드와 사건사고가 없을 수가 없겠다.
나에게는 4번이나 선택할 만큼 스페인인이란 나라에 충성도는 없었다. 스페인은 우리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서유럽에서 볼 수 없는 이국적 역사를 가지고 있다. 북부는 북부대로, 남부는 남부대로, 또 수도 마드리드가 있는 내륙은 가야만 하는 곳이다. 그렇고 보면 스페인은 한국과 같기도 싶다. 어느새 모르는 사이에 파고든 스페인에 대한 애정이 글을 쓰며 그 정체를 드러낸다.
스페인으로의 첫 여행의 마지막 날은 12월 31일 새해맞이였고 우리는 바르셀로나에 있었다. 막연히 유럽 살이 2년 차니 스페인도 유럽의 한 국가일 뿐이니 자신 있어라는 착각을 했다. 독일 겨울을 그대로 지니고 간 우리였다. 바르셀로나 날씨 좋은 줄은 꿈에도 모르고 독일 사람인 양 티 나게 두툼한 오리털 재킷을 껴입고 갔다.
그야말로 여행 준비의 1순위인 날씨 체크 안 하기 상태이었다. 도착하자마자 재킷을 벗어젖힌 아이들이 반팔 차람으로 돌아다니려 했다. 크리스마스여도 반팔 차림 어색할 것이 하나 없는 스페인이다. 나도 더운데 애들 쟈켓까지 들고 다니려니 별로였다.
남편에게 가벼운 바람막이 잠바 하나 사겠다고 하는데 남편 반응이 늦으니 마음이 상한다. 사실 거인나라 독일에서는 맞는 옷 찾기가 힘든 작은 체구라 맞는 옷 구하기 쉽지 않았다. 스페인 왕비와 영부인이 즐겨 입는다는 스페인 국민 브랜드 adolfo domiguez의 웹사이트를 섭렵하고 갔다. 자체 제작한 여행 콘셉트가 쇼핑여행이었는데, 비행기 타고 갔으니 옷을 사겠다면 캐리어부터 사야 할 듯했다. 여행 콘셉트도 미스 콘셉트이다.
남편을 꼬셔 산 것은 아돌포 도미게즈의 진회색 체인백 한 개였다. 그 체인백을 아직도 고이 간직하고 겨울만 되면 윤이 나도록 비건 가죽인 가방 겉면을 핸드크림을 닦아준다. 100유로 남짓이었던 이 가방이 나에겐 샤넬백 못지않다. 크리스마스만 되면 그 백을 꺼내 드는 이유가 한 가지 더 있다면 스페인 광장 때문이다.
연말이면 모여 보신각 종 치는 것을 옹기종기 보던 것이 익숙한 남편과 호박씨다. 사람에 둘러싸여 불꽃놀이를 보거나, 알지 못하는 옆사람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를 한다거나 말이다. 또는, 미국식으로 아무나한테 Happy new year라고 하며 뺨 뽀뽀를 나눈다든가 할 수 있다. 주재원들은 연말에는 한국 방문을 하는 편인데, 우리는 크리스마스 연휴를 평소에는 하기 힘든 일주일 짜리 유럽 로드무비로 만들어내곤 했다. 그래서 해의 바뀜을 각국에서 경험했다. 스페인 현지에 사는 블로거들의 글을 훑어보니 바르셀로나 사람들은 새해맞이를 스페인 광장 몬주익 분수 앞에 모여한다고 쓰여있다. 보신각 종이나 한강변 불꽃놀이보다 멋있겠구나. 게다가 스페인이니까 한국보단 이국적이며, 독일보다는 화끈하겠지 싶다.
숙소는 스페인 광장에서 버스로 두세 정거장이었다. 그 사실을 발견하고는 얼마나 우쭐했는지 모른다. 광장 새해맞이를 남편에게 미리 일러주지도 않았는데 이리도 합이 맞는다. 이 아파트형 숙소를 잡은 남편을 백번 칭찬했다. 이 정도면 우린 2년 차 내공으로 스페인 현지인 라이프를 즐기는 놀라운 부부다!
10시 30분 무렵에 아이들을 데리고 스페인 광장으로 향했다. 몬주익 분수가 보이는 명당자리를 찾기 위해 스페인 광장 안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광장을 채우는 음악소리에 심장이 두근댄다. 역시 스페인이다. 국가가 공인한 클럽 파티다. 바르셀로나 시는 광장 전체를 파뤼파뤼하게 만들었다. 한때는 춤을 좋아했던 나에게 자리가 깔렸으니 흔들어줘야겠다. 아이들과 양손을 잡고 웨이브를 타니 아들이 엄마 부끄럽다고 뿌리친다. 멋을 모르는 녀석이야 싶어 그러거나 말거나 조용한 나라, 독일에서의 해방감을 만끽했다.
둠칫 둠칫 하고 있던 찰나에 분수쇼가 시작되었다. 감동의 도가니탕이 따로 없다. 독일 오버 오젤 시골집에서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겐 눈이 휘둥그레지고도 남을 일이었다. 세계 3대 분수쇼라는 코멘트도 블로그에서 보고 마음에 새기고 갔으니 눈앞에 펼쳐지는 색색의 물기둥들은 당연한 일이다. 큰 아이가 걸어 다닐 때 예술의 전당 음악 분수 시간에 맞춰 보여주겠다고 부른 배를 하고 고생을 한 기억이 스멀 올라왔다. '우리 부부는 애들 호강시켜주고 거야? 그런 거야?'라고 생각하느라 주변을 둘러싸는 인파를 느끼지 못했다.
12시. 카운트 다운을 하고 옆에 있는 이들과 인사를 나눈다. 독일인들은 옆에 한참을 서있던 우리에게 오지랖을 피웠을 테다. 그 정도 시간 옆에 있었다면 어디서 왔냐, 언제 왔냐 한 명쯤은 말 걸었을 법하며, 말문을 튼 대상과 새해인사를 나눴을 테다. 스페인 사람들은 관광객이고 아시안인 우리에겐 관심이 없다. 함께 온 무리들과 시간을 즐기기만도 바쁘다. 그래서 우리 넷은 오롯이 서로를 앉아주며 유럽에서의 세 번째 해를 맞았다. 거기까진 좋았다.
"엄마, 배고파. 졸리고."
배고프고 졸린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분수쇼를 보고 광장 입구로 나서기 시작할 때에는 분명히 옆사람과의 거리두기가 가능했는데, 어느새 사람들 사이에서 옴짝달싹 할 수도 없었다. 스페인 사람들이 독일 사람보다 큰 편은 아녔기에 망정이지, 독일 사람들 사이에 그렇게 둘러싸였다면 산소 부족과 호흡 곤란을 겪었을 것이다. 나와 딸아이 둘 다 말이다. 일단 스페인 사람들의 작은 키 덕분에 시야는 어느 정도 확보 가능하다. 그런데 남편과 큰 아이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핸드폰을 꺼낼 수는 없는 상태다. 한 발짝씩 나아가는데 작은 아이 손을 노치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작은 아이에게 무섭다고 이야기하면 아이가 더 공포스러워할 것 같아서 반복해서 아이에게 읊조렸다.
" 금방 나가. 괜찮아. 괜찮아."
찰나에 나의 모드는 '유러피안'에서 '관광객'으로 변환되었다. '파뤼 파뤼'에서 '압사 가능'으로 스위치가 바뀌었다. '둠칫 엄마'에서 '엄마는 강하다'로 변신이다. 광장을 빠져나오는데 10여분이 걸렸는데 10분은 10일처럼 느껴졌다. 누군가 내 위를 덮친다면 아이를 머리 위로 올려야 하는데 그게 가능할까? 내가 깔린다면 아이는 그 위로 밟고 나가면 될까?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머리에 떠올리는 동안 베네치안 타워가 보였다. 광장 들어올 때 이탈리아 양식이 멋져 보여 눈으로 찜했던 베네치안 타워가 이리도 반갑게 될 줄은 2시간 전에는 몰랐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느끼며 광장 건너 호텔에 이르자 작은 아이가 화장실이 급하다고 한다. 아이도 긴장했었구나. 그제야 아이 표정을 확인할 여유가 생기고 남편에게 연락도 할 수 있었다. 엄마 덕에 호강하지라며 방금 전까지 큰소리치던 호박씨는 온 데 간데없다.
따사로운 바르셀로나 해안에 큰 파도도 작은 파도도 온다. 생각지도 못한 큰 파도는 드물다. 작은 파도를 폴짝 뛰어넘으며 크리스마스에 즐길 수 있게 해 준 지중해가 고맙다. 숨 막히는 파도는 까맣게 잊은 채 고향 해운대를 그리는 남편은 또 스페인을 향한다. 여행의 고생은 스페인에겐 통하지 않았다. 내게 맞는 옷을 찾을 있어서, 어디선가 먹어본 듯한 음식 때문에, 12월에 오리털 따윈 필요 없게 해주는 볕 때문에, 그 해변 때문에, 그 모든 것 때문에 스페인은 가도 가도 그리웠다. 아돌포 도미게즈, 올겨울엔 그렇고 보니 한 번도 안 꺼내 들었다. 옷장 속 스페인의 몬주익 광장을 오늘 꺼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