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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서 착하게 밥하는 법

by 호박씨





남편의 독일 동료들을 초대한 날이었다.

20대 후반의 일본어학과 또는 아시아학을 졸업한 대졸 여성 두 명은 뭘 차려야 좋을까 싶어 남편에게 사전 정보를 물어봤다.




독일인들은 핸드메이드 음식은 뭐든 잘 먹긴 한다. 셀 수 없이 많은 밥 차림으로 터득한 것이었다. 착한 어린이는 독일인들이다. 집에 초대한 이들 중 누구도 음식을 남기고 간 적은 없다. 어떻게 만드느냐고 레시피를 묻기까지 한다. 시댁이든 친정이든 , 남편이든 신혼 초반 먹을 수 없는 음식을 만들어내던 호박씨를 기억하고 있는 한국의 가족들에게 난 요리 젬병인 자다.

독일인들의 찬사에 어안이 벙벙하다. 그들이 쏟아내는 평은 5 스타 아시아 요리 셰프에게다 건넬 법한 말들이다.

어쩌다 요리 실력이 늘었냐고 말한다면 요리는 재료 발이 팔 할이라 겸손하게 정의 내리고 싶다.

4인 가족 외벌이 대기업 대리의 지갑으로는 괜찮은 식재료 사긴 힘들었다. 주부 초년에 육아까지 겹쳐 동네 어딜 가야 좋은 재료를 살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무지했고, 재료 제대로 고르기가 불가하다 보니 요리는 형편없기가 일쑤였다.


요리는 재료가 전부라는 사실을 독일에서 음식을 하면 할수록 느꼈다. 산지에서 가까운 재료를 파는 재래시장 야채만 해도 가격이 싸지 않지만, 퀄리티는 훌륭하다. 주재원 중 독일 무와 배추로 김치를 담가먹는 몇 안 되는 한국인이 호박씨였는데, 한인 마트에서 사 먹는 것보다 해 먹는 맛이 훨씬 좋아서 만들어먹지 않을 수 없었다.

주재원 월급 덕분에 지갑은 두둑해졌고, 마트 물가를 관리가 철저한 독일 덕에 계란, 밀가루 등의 기본 식재료는 퀄리티 대비 착하기 그지없는 가격이다. 계란 노른자는 해 질 녘 노을 같은 개나리 색이었고 한 봉지에 1300원, 1유로밖에 안 하는 독일 밀가루로 만든 수제비 반죽은 숙성이 필요 없을 만큼 쫀득 그 자체였다. 집에서 음식을 하겠다 마음먹는다면 맛없게 만들기가 더 어려울 지경이랄까?



잘한다 잘한다 하면 '좀 더 더더'를 하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이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에 남편이 바란다면, 그가 옳은 일이라고 한다면 또는 그의 커리어 앞길에 조력이 되는 것이라면 저녁 식사야 얼마든지 차릴 수 있지 했다. 못하겠다, 힘들다 소리 대신에, " 당연히 할 수 있지, 얼마든지."라고 하고 만다. 공황과 번아웃이 번갈아서 파도처럼 밀려들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남편의 양 어깨에 짊 어맨 짐 중 함께 울러맬 바가 있을 것이라 여겼다.

멋있어지려고 작정하고 짊어지기로 한 건데, 부엌 노예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자발적으로 한 일인데, 하녀가 되어버리는 순간이 있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말이다.






건장하고 젊은 독일 여직원들은 싹싹 접시들을 비워냈고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 동북아시아 문화에 익숙한 이들이라 제대로 먹을 줄 알아보였다.

신이 난 남편이 식당 한편의 김치냉장고에서 어머니가 챙겨 보내주신 고추장 단지를 갑자기 꺼내 들었다.

막상 그들이 먹은 음식에는 고추장이 들어간 음식은 없었는데, 전통의 손맛을 보여주고 팠나 보다. 아껴 먹고 있는 고추장을 밥숟가락으로 크게 퍼내더니 그들에게 권한다.

그 사이 고추장 단지는 식탁 아래로 낙하해 박살이 났다. 깨진 단지 조각은 날카로웠고 고추장이 범벅이 되어 있어 하나하나 주워 담아 쓰레기통에 버려야 할 판이다.

식탁 건너편에서 다 먹은 접시를 치우다 깨진 고추장 단지를 보고 얼른 다가갔다.

호박씨가 다가가자 남편은 직원들이 있는 식탁에 앉았고 엎드려 치우는 이는 나 혼자가 되었다.

여직원들이야 서양인에게 그런 정서가 있겠는가? 남편이 깨뜨렸을 당시에도 그들은 "아이고" 한마디가 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팀장님네 집에서 회식을 하였는데, 팀장님이 고추장 단지를 떨어뜨려서 산산조각 박살이 났다. 당신은 가만 보고 있을 텐가? 답은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 호박씨는 예의상 '무엇으로 치울까요?'부터 물을 것이다. 그리 살아왔다. 그렇게 하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고 자랐다.


두꺼운 고추장 단지가 타일 바닥에 깨지니 산산조각이 나 파편이 예사 날카롭지 않았다. 날면이 엄지 손가락으로 쑥 파고들어 와 피가 나도 고추장이 워낙 붉다 보니 묽은 피는 보이지도 않는다.

"아야." 하고 쩔쩔매며 손가락을 동여매었다면, 식탁에 앉아하던 이야기를 마저 하던 세 사람이 나를 쳐다봤을까? 그런 쇼라도 해서 내가 여기 이 일을 하고 있다고 했었더라면 오늘 이 글을 쓰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마음속 한편에 자리 잡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피가 흐르는 엄지를 꼭 쥐고 가 반창고를 붙이고, 고무장갑으로 무장으로 하고 치우기를 마무리했다.

5년이라는 시간을 갈아 넣은 부엌인데, 그 부엌에 대해서 기억하는 순간이 그날이 아니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남기는 글이다. 직원들 앞에서 Clumsy 한 모습을 의도치 않게 보이게 된 남편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 싶었을 것이다. 구부려서 치운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하는 서구인이니 멀끄러미 보고 있었을 것이다. 일의 결과는 원인을 제공한 이가 해결해야 한다고 배운 젊은이들이었다고 생각하자.


부엌 노예도, 하녀도, 강제 노동자도 아니다. 그렇게 취급받는 순간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시간은 흘러가고 기억만 남는다. 한 번은 그리 취급받아도 두 번은 안 당하면 된다. 호박씨는 호박씨다. 글쓰기를 즐기고, 감정도 풍부하고, 기억력도 몹시 좋은 지구 여행자다. 잠깐 왔다가는 이 시간 동안에 어떻게 취급받건 상관없이 존재 자체로 소중한 생명이다. 나를 포함한, 이 글을 읽는 이 그리고 읽지 않는 모든 이를 긍휼히 여기는 삶을 살고 싶다. 지금 이 순간부터!


대문 그림

폴 고갱, The meal, 1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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