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플 때 아프다는 말을 잘 못한다. 안 아파도 아픈 척을 할 줄 알았으면 좋겠다. 나일론 환자 할 줄 아시는 이가 부럽다.
1년에 한 번, 생일을 지난겨울 끝에는 몸살감기를 앓는다. 아이였을 때의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겨울의 끝자락은 오한에 열이 나는 종합 감기를 앓곤 했다. 열감기나 소화가 안되어 메슥거리는 증상도 함께 찾아와, 식욕이 떨어지는 연례행사 다이어트가 찾아온다.
해가 유난히 없던 2016년의 시작에 노로 바이러스에 걸린 작은 아이는 고열의 감기로 한 달을 학교를 가는 둥 마는 둥 2월을 보냈다. 혼자 아이를 돌보는 2월이 지나가고 나니, 기운이 풀려 아프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아버지가 싸 보내주셨던 어린이 감기약과 설사약, 소화제로 아이는 버텼다. 인근 한국인 소아과에서 타 온 약은 먹어도 낫질 않는 탓에 약사 외할아버지의 덕에 아이는 학교로 돌아갔다.
그리고 호박씨가 아플 차례. 아프다고 말할 이가 없으니 아버지가 싸주신 약만 쳐다봐도 눈물이 났다. 청승도 이런 청승이 어딨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약을 먹고 털치고 일어나면 될 일이었다.
야근과 접대를 번갈아 해서 얼굴 맞대기 힘든 남편은 없다셈 치고 산 지가 오랜데도 아프고 싶었다. 엄살 피울 이가 없으니 스스로에게 시위하듯 약을 먹지 않고 감기를 그대로 겪으며 지나갔다.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거나, 장보는 일 말고는 사람 만날 일이 없으니 세상의 그 누구도 호박씨가 아픈지 알지 못했다.
" 호박씨, 어디 아파요?"
언니라고 불러 드렸던 그분은 고등학생 아들 둘을 둔 H사 법인장 사모님이셨다. 집주인이 언니 집과 우리 집, 위아래층의 2채를 소유하고 있는 관계로 언니와는 공통의 적인 독일 집주인을 매개로 돈독했다. 현관문만 열면 계단식 복도가 나오니, 문 앞에서 사람들 오르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얼굴 마주치지 않고도 지나다닐 수 있었다. 그날따라 장보고 올라오시는 언니와 마주치게 되었다.
" 아니요."
아니요라니. 아픈 것을 아는 타인이 세상에 한 명도 없어서 서러운데, 한사코 아니라는 말이 입에서 나온다.
5분 후, 현관문 앞에는 눈에 익은 종합감기약 각을 들고 언니가 서계셨다.
" 한국 약이 잘 듣더라고요."
한국 약을 먹어야 잘 낫는다. 지난달 내내 아이를 보며 깨달은 것이었다. 집안에는 아버지가 주신 어른용 한국 약이 많다. 약국을 털어온 듯 쌓인 종합 감기약이 있으니 언니가 들고 오신 감기약은 마다했다.
언니가 목소리를 높이시더니 손에 쥐여주셨다.
" 안 아픈 줄 알았으니까 먹어요!"
청승을 떤다. 현관문을 닫아주고 언니가 가시고 나서도 한참을 문 앞에 서서 약을 쳐다보았다.
왜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못 하나.
왜 아픈데 약 안 먹고 아프고 있나.
한국에 와서 처음 접한 단어 ' 코칭' 이였다. 미국 브랜드 코치도 아니고 도대체 코칭, 이것이 뭔지 아직도 잘 모른다. 다만, 코칭을 주변에서 권하기에 시간을 들여 대화를 나누고 나면, 상담이랑 비슷한 것인가 하고 짐작해봤더랬다.
친한 코치 H의 블로그에 본인의 어머니 K분이 공짜 코칭 신청을 받으신다는 포스팅을 보고 부랴부랴 신청을 했다. 육십이라는 나이에 생전 안 걸어보던 것, 난생 안 해보던 일을 시작하는 이에게 혹여 아무도 신청하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나의 한 시간을 사용하여 이 분에게 응원 기운을 보낼 수 있다면, 모르는 어느 누군가에게 나의 경력 단절 해방을 응원받을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
"집에서 얘들이나 돌봐라."
" 엄한 생각 그만하고 가만있어라"
"가족에게 충실해라."
이 말들 쏙 빼고, 조건 없는 응원이 그리웠다. 가족에게 둘러싸여 산 2년이라는 시간 동안, 조건 없이 나를 응원해준 것은 아이들 뿐이었다. 아이들로는 부족했다.
새벽 6시 30분, 첫 전화를 하던 날, 1시간 내내 줄줄 이야기를 쏟아냈다. 남편과 말 안 한 지가 두 달째, 친정 엄마가 통화를 끊은 지가 2주쯤 되던 때였다. 기대고 싶은 두 사람에게 미래에 대한 축복을 기대하고, 거절을 당하는 것이 한꺼번에 덮쳐 대는 타이밍이었다. 연세가 지긋하신 K 코치님의 무엇이 도움을 청할 용기를 불러일으켰는지 그땐 알지 못했으나, 코치님을 도와드린 다는 빌미로 도움을 구하고 있었다.
공황 발작 다음날이었다. 새벽 시간도 아닌데 코치님이 연락을 하셨다. 전날의 일을 써 내려간 브런치를 톡으로 보내드리고, 가만 기다렸다. 코치님은 전화로 다짜고짜 무엇을 좋아하냐고 물으셨다. 입맛이 없을 때는 뭘 먹어야 한다신다. 먹어야 산다고 하신다. 엄마가 해주던 나물이 생각났다.
다듬는 데에 한나절 걸리는, 손 많이 가는 나물. 한 봉지 가득해봐도 , 끓는 물에 넣으면 숨이 죽어 한 줌 밖에 되지 않는 나물. 그 어려운 나물이 먹고 싶다고 말했고, 코치님은 포항서부터 택배로 갖은 나물을 챙겨 보내셨다.
뭐가 먹고 싶냐는 질문을 남편에게 받고 싶었다. 늘 받아왔던 데로 친정엄마에게 받고 싶었다. 공황장애는 나도 겪고 있고 이겨 내기 힘든지 엄마도 잘 아니 우리 한번 같이 지나가 보자 토닥임을 받고 싶었다. 바라던 사람들에게는 소식이 없는데, 안지 한 달이 채 안된 이에게 삶 중에 제일 곤란스러운 순간을 뒤집어 펼쳐내 보이고 있다. 거기다 심지어 도와달라고까지 하고 있다.
독일 살면서도 이렇게 죽겠다는 소리 하고 살았더라면 유럽 살이가 윤택했을 것 같다. 주재를 준비하시는 이에게 감히 조언하자면, 도움을 구하는 법을 탑재하시라는 것이다. 모자람과 부족함을 까보일 베포 또한 두둑했으면 좋겠다. 남의 나라처럼 한국에서 살아남아 보려 버둥대고 있는 오늘의 호박씨에겐 " 도와주세요."라고 소리 높일 용기가 식탁 의자에 멀쩡히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게 하는 힘이다. 택배 상자 가득 고소한 참기름 내음을 풍기는 나물반찬과 집안 가득 쌓여있음에도 손에 쥐어진 감기약은 이 삶을 살아내고 기록해야 하는 명분으로 삶 속에서 피어나고 있다.
대문 그림
자크 에밀 블랑슈, 책 읽는 루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