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를 먹어 본적은 있다. 근데 전문적인 바에 가서 사먹어 본적은 없다. 내가 비싼 양주 집에 가서 양주를 시켜먹는다는 것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대충 들리는 이야기에 의하면 네모난 얼음을, 손으로 깎아서, 잔에다가 넣어준다는데. 난 본적이 없다.
현수가 이별을 했다고 한다. “나 4키로 빠졌어, 실연의 아픔이 큰가봐.” 물어보지도 않은 대답을 갑자기 들은 나는, 당황스러웠다. 그런가보다. 그냥 얼굴이나 보러가야지. 마침 내일모래 학교에 나오지 않겠냐고 물어봤다.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수업이 5시쯔음에 끝나니까, 버스타고 가야지. 몇 일 뒤, 피곤함과 알 수 없는 귀찮음을 뒤로 하고 버스에 탔다.
버스에서 졸았다. 그냥 피곤했다. 원래 버스를 타면 잠이 온다. 서울 톨게이트 앞은 어둑어둑했고, 버스 안의 히터는 멀미를 유발했다. 버스창문은 열수가 없었다. 원래 그랬다. 저번 주만 해도 에어컨이 나왔는데… 겨울에도 에어컨을 틀어줬으면 좋겠다. 더우면 멀미가 나니까. “현수야 나 가는 중인데 어디로 갈까?”
생각한 것보다 사람이 많이 있었다. 다 아는 사람들이다. 우리 과 친구들. 룸을 잡아놨다. 다들 이미 적당히 먹었다. 김치찌개는 이미 바닥을 보이고 있었고, 술병은 의자 옆에 줄 서있었다. 가운데 앉아서 죽상을 하고 술을 먹는 사람과, 언제쯤 이야기를 꺼내나 기다리는 사람들. 나는 얼마간 후자에 속해있었기에, 대충 술을 먹고, 술을 먹였다. 그냥 이 슬픈 분위기가 싫었다. 1시간 넘게 버스타고 와서 보이는 것이라고는 형편이 없었다. “야 그래서 빨리 얘기해봐.” 서연이 누나가 술이랑 안주를 더 시켰다. 그 주먹밥하고 아이셔맛 소주. 감바스와 바게트. 소주 빼고 별로 맛이 없었다.
당연히 슬픈 이야기겠지. 진짜로 슬픈 이야기였다. 이야기를 하기 전에 다들 슬퍼할 준비를 한다. 그 모습이 웃겼다. 진짜로 슬플라고 이야기를 듣나? 싶었다. 옆에서 토닥여주는 사람, 앓는 소리를 내는 사람, 진지함을 참지 못하는 사람(그건 나인 것 같다), 진지하게 듣는 사람 등이 있었다. 가슴아픈 이야기는 맞는데, 나랑은 너무 먼 이야기처럼 들렸다. 언제 마지막으로 연애를 했었나 생각을 해봤는데, 조금 희미하게 보였다. 담배를 피우고 싶어졌다.
“너무 슬퍼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좀 그렇네.” 내가 말을 꺼냈다. 담배부스 안에서 나는 수연이에게 한 개비를 주었다. “나도 마음이 좀 그래.” 흰 연기를 내뿜는다. 술을 먹다가 담배를 피우면, 어지럽다. 나는 왜 술 먹다가 담배를 피우는지 모르겠다. 빨리 취하는 게 좋은 것만은 아닌데. 빨리 취하면 나도, 다른 사람들도 피곤하다. 취해서, 속이 좋지 않은 상태가 너무 싫다. 문에 있는 유리로 현수가 보인다. 어렴풋이 나도 보인다.
노래도 부르고 양주도 먹고(이건 좀 잘못된 선택이었다.) 여러 이야기를 하다보니, 시간이 많이 지났다. 현수는 힘들어 보였다. 현종이랑 현수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진한아, 담배 한 개비만 줘봐.” 나는 진짜로 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현수도 진짜로 필 생각 이었다. 현종이는 놔둘 생각이 없었다. 주려던 담배는 결국 내가 피웠다. “야 나도 그 부끄러운 사건이 있을 때 필뻔했는데, 안 핀거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그 부끄러운 사건이 뭔데?” “지수얘긴데.. 오늘 과방가서 해줄게.” 두 개비째 담배는 참을 만했다. 지수랑 마지막으로 이야기한게 하루 전이었음이 생각이 났다. 손이 시려워질즈음에 안으로 들어갔는데, 장소를 옮기기로 했다. 예지의 카드에서 20만원이 넘는 돈이 나갔고, 양주는 7만원 언저리였다. 내 카드에는 4만원이 있었다. 조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장소를 옮겨서 다른 안주를 시키고 무슨 무슨 말을 들었는데, 다 재미가 없었다. 나는 재미있는척 했다. 영아랑 수연이랑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 이번엔 영아에게 담배 한 개비를 주었다. 들어와 보니 현수는 죽어있었다. 이미 고개를 들지 못하는 상태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현종이와 나는 현수를 데리고 과방으로 갔다. “야 그래서 지수랑 무슨 일 있었어?”, “아 그 작년 학기초에……”
그런 이야기를 듣는 것이 너무 오랜만 이었다. 누가 누구랑 어쨌는데 어쨌고 누가 그런 사람이더라. 대부분 이런 이야기에서 비판 당하는 대상은 – 나랑은 관련이 없거나, 나에게는 나쁜 사람이 아니다.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난 사실 지수가 좋았다. 이야기를 다 듣고도 나는, 아무런 이야기를 듣지 않은 사람처럼 평소처럼 지수를 대해줘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난 지수가 싫어졌다.
현수는 전기장판 위에서 영면했다. 숨은 쉬고 있었다. 표정이 없었다. 현종이랑 나는 이불을 덮어주었다. 작년 겨울 엠티에서 이불없이 잠들어있던 지수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모르고 지수 배게를 훔쳐가서 미안해서 그랬었다. 하얀 얼굴에 편안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현종이와 계속 말을 했다. 지금 여자친구 이야기, 난 왜 연애를 안하는가, 현수가 불상하다, 정호형, 등등등. 결국 계속 머릿속에 맴도는 생각은 지수생각밖에 없었지만은 계속 이야기를 했다. 얘는 왜 현종이한테 그랬을까? 환이 한테는? 솔이는 불상하지도 않은가? 나는 왜 지수가 좋았을까? 현종이랑 민지는 정말로 잘 어울린다.
지수는 매력있는 사람이다. 이 의견에는 이견이 없을 것 같다. 밝은 성격과, 터프함, 적당히 오염된 것 같은 두뇌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뽀얀 얼굴, 담배를 피면서 찡그려지는 얼굴, 상스러운 어휘, 매일 매일에 분노와 짜증을 느끼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하는 성실함. 그 삶에 찌들어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 매력적이다. 그 생각과 행동이 따로 노는 그런 인간들과는 다름을 느꼈다. 그 동안 나는 지수와 함께 분노해 주었고, 웃어주었고, 담배도 피웠다. 현종이에게 그런 상처를 주었는지는 몰랐다. 일단 나에게는 잘해주었으니까. 같이 밥도 먹고, 술도 먹고 그랬다. 물론 단둘이 그랬던 적은 없었다. 그래도.
현종이에게 지수는 악몽으로 남았다. 현종이는 지수 때문에 담배를 필 뻔했고, 과 생활을 못할 뻔 했으며, 어떤 사람하고는 아주 멀어져 버렸다. 현종이는 그때의 그 기억을 나에게 말해주었다. 나도 지수에대한 기억을 말해주었다. 나의 지수와 현종이의 지수는 다른 사람이었고, 현종이의 지수는 나의 지수를 지워버렸다. 나의 지수도 나쁜 사람이다. 그래도 지수한테 지금까지 했던 태도를 바꾸지 않을 것이다. 실제 지수는 나에게 나쁜 짓을 하지 않았으니까. 4시쯤에 잠에 들었다. 생기가 없는 현수 옆에서 건강한 현종이 옆에서.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엄청나게 추웠다. 머리가 아팠고, 어지러워서 다시 누울 수가 없었다. 현수는 어제의 일을 잘 기억하지 못했다. 배가 고팠고, 배가 아팠다. 과실 앞에 음식물 쓰레기 통에는 누군가 버린 피자의 도우만 보였다. 입에서 담배냄새와 소주냄새가 섞인 쓰레기 같은 냄새가 났다. 그냥 집에 가고 싶었다. “아마 더치페이하면… 2만 얼마쯤 나오겠지.” 해장한다고, 잔치국수를 먹으러 갔다. 서로를 바라보는데 꼴이 말이 아니었다. 현수의 잔고는 3자리수를 기록했다. 다 먹고 집에 가는 길에 1년동안 붙어있었다던 하리보를 찾으러 갔다. 하리보는 끈적함을 기둥에 남기고 사라져 있었다. 난 혼자 버스를 타러 갔다. 어제 일을 가만히 생각해 봤다.
기억에 남는 것이라고는
7만원짜리 양주는 맛있었다. 분홍색 – 얼음도 양동이 채로 주고, 따가운 집게도 주고, 토닉워터도 주고, 전용 잔까지 있는. X라고 커다랗게 써있었다. 얼음은 정수기 얼음이었다. 반은 둥글고, 반은 각이 진. 얼음을 씹을 수가 없었다. 밀도가 엄청나서, 공기방울도 안보였다. 7명이서 나누어 먹기에는 양주가 조금 적었다. 그래도 나누어 먹었다. 서연이 누나가, 화학자처럼 한잔씩 제조했다. 한잔씩, 핑크색 음료를 음미했다. 너무 쓰다고 하는 사람, 감기약 맛이 난다고 하는 사람, 맛있다고 하는 사람, 등등이 있었지만, 그 누구도 소주보다 맛없다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야, 한 병 더 시킬까?” 아무도 양주가 얼마인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미 현수의 이야기는 지난 일 이었다. 현수 빼고는 그랬다. 그저 노래를 틀고 신나게 부르며 춤을 추고 있었다. 그때는 현수도 그랬다.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불렀고, 다시 소주를 마셨으며, 신나게 웃었다. 술집에서 나오기 전까지는 모두 그랬다.
어제는 그렇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