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 나의, 이제는 없을, 눈이 녹고있는, 뭐 그런.
어제는 눈이 내렸다. 눈을 정말 좋아하는 나로서는 좋은 일이었다. 저번 주에는 벚꽃이 만개했다. 돌풍과 눈은 벚꽃나무를 흔들었고, 눈과 꽃잎이 같이 내렸다. 눈은 바로 녹아내렸지만, 꽃잎은 그 녹은 물에 녹는 듯 녹지 않았다. 난 그 모습을 베란다 너머로 바라보았다. 혼란스러웠지만, 아름다웠다. 따듯한 눈이었다.
그게 오늘도 늦게 일어났다. 일을 시작하면서 수면 패턴이 변한 탓이었다. 점심을 먹고 출근해서 자정 넘어서 퇴근했다. 분명 일 이외에 무엇인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쉽지 않았다. 잠이 쏟아졌고, 뭔가에 집중을 할 수 없었다. 다만,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에는 별로 힘들지 않았다. 난 항상 A의 연락을 기다렸다. 그건 이 팍팍한 삶의 한줄기 쉼이었다. 그 이외에는 삶이 별로 의미가 없었다. 다들 어떻게 살아가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다같이 출근하고 다 같이 퇴근하는 그런 삶을 대부분 살아내고 있었다.
그러니까, 1년 전이었다. 난 절망에 빠졌었고, 다시는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분명 목표가 있었고, 해야 할 일도 있었다. 그게 없던 시절의 방황은 나를 자꾸만 삼키려고 했다. 적응을 하려고 했다. 그 중독이 없는 그 상태에 적응하려고 했다. 분명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다. 사실 남들에 비하면 큰 절망도 아니었다. 중독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에 대한 설명에 가까운 절망이었다. 자꾸만 늪으로 빠졌다. 난 돈도 없었고 뭘 해야 할지도 몰랐다. 난 홀로 있었고, 아무한테도 쉽게 이야기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무릎이 잠기고, 허리까지 잠기기 직전에, 난 발견되었다. 그게 그런거지 뭐. 난 살 사람이었나 보다.
원래 비가 내렸다. 그러다가 점점 눈으로 변해갔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8월의 크리스마스라는 영화가 생각났다. 아직 4월이지만은, 아무튼 눈과는 거리가 먼 시기였다. 그 비를 뚫고 어디론가 걸어갔다. 머리와 입으로는 안된다는 말만 반복했지만, 난 아무튼 걷고 있었다. 버스를 탔고, 역 앞에 내렸다. 대 공사를 하고 있는 역 앞은 벽뿐이었다. 뒤로 머리만 보이는 거대한 역사와, 양 옆으로 지나가는 사람들, 자리를 바꾸어서 구걸하는 사람들 그리고 불편한 몸을 이끌고 나와서 날씨에 맞게 우산을 파는 사람. 그 사람들 사이로 쉬지 않고 걸아갔다.
결국 바로 그곳에 가지 않았다. 역 안으로 들어가는 에스컬레이터에 몸을 실었다. 서점에 들어갔다. 읽지도 사지도 않을 책을 들여다봤다. 심장은 자꾸 뛰고 있었고, 숨은 가빠왔다. 베스트셀러코너에서 어떤 책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별로 흥미가 없었다. 결국 편지지 하나를 골라서 나왔다. A에게 편지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A와 나는 아날로그 한 것을 좋아했다. 편지를 좋아했고, 문자를 나누는 시간보다 얼굴을 보는 시간을 더 소중히 생각했다. 가짜와 진짜에 대한 구분을 할 줄 알았다. 우리는 그랬다. 다만 당장은 직접 볼 수 없다는 점이 참 아쉬웠지만은, 어쩔 수 없는 일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 사유의언어는 해체되었지만, 내면에 녹아버렸다.
역은 많이 변해있었다. 원래 있던 것들이 대부분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원래 없던 것들이 많이 생겨났다. 곧 흥미를 잃고 역 밖으로 나왔다. 머리가 아파왔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경직되어, 인위적으로 박제된 뱀 같은 공간에서 나오고 들어왔다. 자꾸 왔다 갔다 그 길을 돌아다녔다. 난 갈등 중이었다. 안된다는 말을 자꾸만 혼자 속삭이면서, 결국 그 망해버린 그 거리로 발은 향해갔다. 거리 앞에서 두 미군이 사람들의 눈치를 보다가 그곳으로 들어갔다. 그 다음 골목에서 나도 그렇게 했다. 모르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거리는 어두웠다. 날씨 때문이 아니라 -
불이 켜져 있는 곳이 없었다. 다 커다란 X표시와 검은색 테이프로 투명한 유리를 가리고 있었다. 이따금 일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 거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서로에게 놀라울 정도로 관심이 없는 척을 했다. 건물 안에 있는 사람도, 거리를 걸어다니는 사람도, 차를 타고 돌아다니는 사람도. 같은 범주의 영역에 있는 사람들 끼리는 더욱 그랬다. 차가 지나다녔다. 인도가 없었지만, 사람과 차가 길을 공유했다. 그게 차와 사람은 같은 영역을 공유했다. 검은색 차와 하얀색 차. 두 SUV. 경찰차가 서 있었다. 내가 지나가면 경고방송을 했다. 이 거리를 나가라고 했다. 건물에 들어갔다가 걸려서 300만 원 이하의 벌금을 물기 싫으면 나가라고 했다. 모두들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 거리에 들어온 이상, 그런 경고방송 따위는 다들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쓸모가 없었다는 말이다.
거리의 코너마다 스피커와 사람을 인식하는 센서가 있었다. 그리고 영아가 있었다.
야.... 너! 야 일루 와 봐
아 왜요
조금만 놀다가.
여긴 안 망했네요?
사실 망했는데, 몰래 하는 거야
그 유리벽에는 절연테이프로 그어진 커다란 X표시와 커튼이 쳐있었지만, 안에 불은 켜져 있었고, 영아는 창문을 살짝 열어서 나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누나는 아직도 일 하시네요
그렇지, 내가 어딜 가. 놀다 가라 응?
난 고개를 도리도리 저였다.
왜? 무슨 일 있어?
그냥 누나 잘 있나 보러 왔어요. 독일에서 온 지 얼마 안 되었거든요
그래? 놀다가 오랜만에
아뇨 돈 없어요.
그래.....
이게 마지막이겠네요
그러게
잘 지내세요
너도. 잘 지내
그리고 바로 머리가 아파오면서 내가 뭐 하고 있나 싶었다. A가 너무 보고 싶어 졌다. A는 전 남자친구에게 배신을 당했었다. 난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나. 갑자기 너무 추워졌다. 검은색, 하얀색 SUV가 내 앞을 3번째 지나갔다. 아까 미군 2명이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난 그 길로 그 거리를 빠져나왔다. 역이 보였고, 버스 정류장이 보였다. 안경에 물방울이 내 눈을 가렸다. 손과 이가 덜덜 떨렸다. 가만히 정류장에 앉아서 생각했다. 그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고, 곧 버스가 왔다.
그 버스를 타고 떠났다. 따듯한, 아무도 없는, 그렇지만, 나의 귀여운 강아지가 기다리고 있는 - A를 기다리는 방 안으로 천천히 그리고 빠르게 향했다. 스스로를 칭찬하면서, A를 그리워하면서, 80년대의 모습을 하고 있는 그 거리에 작별을 고했다. 이따금 패닉에 빠져서 머리를 쥐어뜯고 비명을 질렀지만, 그 뿐이었다. 밑에 집에 사는 사람도, 옆집에 사는 사람도, 나에게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곧 A에게 연락이 왔고, 빠르게 안정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