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추석
시골에 가는 길은 항상 재미있다. 오늘도 재미있었다. 이대로 가면 제시간에 못 도착할지도 모른다는 점만 빼면 그랬다.
어제 브루클린 나인나인을 너무 늦게까지 봐서 계획보다 늦게 일어났다. 추석에 지내는 차례를 못 지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건 너무 형식적이고 오래된 의식이기 때문에 나는 상관이 없다. 나에게 상관이 있는 것은 도착해서 받게 될 용돈이다. 21살이나 되어서 아마 80년대이면 결혼해서 어린아이들에게 용돈을 줄 나이일 테지만 지금은 2020년이기 때문에 상관이 없다. 그냥 가서 받으면 되지. 눈 감고 – 눈을 감으면 눈치를 못 본다. – 받으면 그만이다. 이제 나는 군대에 갈 나이. 군대에 간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스트레스이지만, 주변에서 언제 가는지, 빨리 가야 하는데 안 가냐는 눈치를 주는 것, 군대에 가서 돈을 벌어와야 한다는 말을 한다는 것은 더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다. 다 맞는 말이고, 나도 그렇게 할 작정이었기에, 듣지 않아도 될 말들을 듣는 것 같아 더 짜증이 난다. 사실 듣는 척하면서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은 내가 잘하는 일이라 뭐라고 하던지 상관이 없다.
양말이 잘 안 들어간다. 너무 오랜만에 양말을 신는 탓일 거다. 자꾸 전화가 온다. 언제 오냐고. 자꾸 거짓말을 한다. 아 그 지하철 역인데 지하철 기다린다고. 또 전화가 온다. 언제 데리러 갈까? 나도 모른다고, 다시 전화한다고, 거짓말한다. 적당한 거짓말은 문제 될 것이 없다. 특히 사소한 거짓말은 그렇다. 뭐 중요한 순간에만 솔직하면 된다. 그때 믿지 않아서 손해 본 사람은 내 말을 믿지 않은 그 사람 탓이니까 아무렴 나는 상관이 없다. 지하철 역에 꽤 늦게 갔다. 물론 평소 생활 패턴을 생각해 보면 엄청 이른 도착이지만, 공휴일에는 배차시간이 길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또 전화가 온다. 언제 오냐고. 아 배차시간이 긴 줄 몰랐다. 늦을 것 같다. 중요한 순간이라 솔직하게 말했다.
1호선 끝자락의 지하철은 낭만이 넘친다. 앞사람의 뒤통수 너머에는 아침의 논과 어리숙한 아파트와 상가들이 보이는데, 노래를 들으면서 보고만 있어도 시간이 금방 간다. 도착했더니 차례가 끝났다고 한다. 아빠차를 타고 시골로 간다. 아무 말이 없다. 왜 화가 났을까? 삐졌나? 그러든지 말든지 그냥 놔두면 된다. 나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무슨 말을 했다가는 꼬투리를 잡고 화풀이를 할 것이 뻔하다. 여성호르몬이 풍부한 50대의 남성의 분노란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뭐 왜 화났는지 말을 하던가, 그냥 빨리 화내고 끝내던가 그런 법이 없다. 그렇게 말하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남자답지 않음”의 상징이겠지. 일은 역시나 터졌는데 집 뒷산의 산소에 올라가서의 일이다. 야 너도 이제 군대 갈 때가 됐는데 언제 가니? 아 이월에 갑니다. 그랬다. 네놈은 군대 갔다 와서 좋겠다 40대 아저씨야 (묵음) – 야 요즘 군대 밀려서 6개월 걸린단다. (빨리 신청했어야지. 내가 맨날 가려면 6개월 정도 준비해야 한다고 그랬는데.) 일부로 내가 속이 탈 것 같은 말만 기가 막히게 던진다. 아마 기회가 된다면 더했을 텐데 나는 그 이후로 아무 말도 안 했다. 아빠의 처신을 지켜주는 것은 나뿐인데 그건 본인이 제일 잘 알겠지.
시골에서의 시간은 항상 편안한 시간이다. 일도 대충 하고, 맛있는 밥을 먹고, 낮잠도 자고, 집에 없는 티브이도 보고. 그러다 보면은 시간이 금방 가있다. 또 밖에는 귀여운 강아지도 있고, 가끔 장작이라고 가져온 나무더미 사이에 힙한 물건들이 껴있을 때도 있다. 저번주에 있었던 노래방 창문이 그랬다. 갈색 창문틀에 하얀색 페인트로 그려진 여자가 노래하는 모습 아마 그건 도우미를 보고 그린 것 같은데 그냥 멋있었다. 마당의 강아지는 공일이다. 우리 가족 전화번호가 01로 끝나서 공일이다. 저번주에 봤을 때는 고모부할아버지가 버려두신 소비장에 붙어있던 꿀벌들을 잡아먹어서 프로폴리스냄새가 났었는데, 이 녀석 1주일 만에 나를 경계한다. 소시지 한 개를 주고 또 친해졌다. 겁은 많지만 좋은 녀석이다.
사실 아빠가 삐진 것은 나로서는 좋은 일이다. 눈치를 주지 않기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된다. 다만 아빠가 거실로 나와있을 때는 눈치를 보면서 밥을 먹어야 한다. 그래도 눈치 보면서 밥을 먹는 데에는 도가 텄기 때문에 상관이 없다. 이제 수원에 가야 하는데 아빠가 잔다. 이런 일은 흔히 있어왔던 일임으로 난 큰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내가 할 것을 하면 된다. 먹고 자고 핸드폰 하고 또 먹으면 된다. 나 빼고 다들 조급해하니까 나도 조급해할 필요는 없다. 나를 빼도 아빠를 괴롭히는 사람은 널렸으니까. 그리고 장장 2시간의 눈치싸움 끝에 출발했다. 가는 동안에 끊임없이 갈굼을 당하는 아빠를 보면 좀 불쌍하다. 도와줄 이유는 없으니 나도 즐겁게 참여한다. 그러다가 한두 마디만 아빠를 도와주면 나에게 삐진 것이 풀리게 되어있으니 나로서는 손해 볼 일이 없다. 다행히 아빠가 나에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도 아마 괴로웠을 것임으로 다행이다. 뭐 나는 별 상관이 없으니 당신 편한 대로 하시라. 다시 나와 아빠는 친구가 되었다. 일상적인 사건은 대게 어이없이 풀리기 마련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