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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생 Sep 04. 2023

치매 엄마의 우당퉁탕 유쾌하고 개구진 하루[8]

빵 한 조각, 물 한 컵//치매환자 가족의 사소한 갈등

(엄마가 사랑하는  우리 집 정원.  엄마가 마땅하다 싶은 모퉁이에  화분이며 의자, 탁자 할 거 없이 모아놓기 일쑤이던 곳.)

운동 가는 길에 텃밭 상추를 뜯어 언니 집으로 향했다. 현관문에 들어서자 

아이고, 엄마가 빵 한 조각을 오른손에 들고 왼손에는 물 컵을 들고 있는 게 아닌가.

노인주간보호센터 송영차가 오전 8시 40분쯤에 오니 그전에 급하게 드시는 거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3달 전부터 언니가 모시고 있는 엄마는 오빠와 있을 때보다 한결 편안해지고 웃음도 많아지고 화내는 일도 줄었다. 며느리보다 언니가 세심하게 엄마의 마음도, 몸도 챙겨주고 물 흐르듯 대화하고 살갑게 대하니 그럴 수밖에. 식습관도 한몫했기에 나는 더 말을 할 수 없었다.


오빠네는 아들이 둘이라 주로 육식 위주로 식탁을 채우고, 언니네는 주로 채식 식단인지라 엄마 장이 편하니 몸에 여유가 생기고 그 덕에 분노 조절도 될 수 있겠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침에 달랑 물 한 컵과 빵이라니. 쑥떡도 있고, 찐 계란 한 알과 사과 한쪽, 또는 찐 고구마 한 개만으로도 충분한데 왜 빵을 드시고 있는 건지 마음이 복잡했지만 치매 14년 차인 엄마를 모시고 있는 언니에게 내가 할 말은 없어야 했다. 그것도 여유롭게 운동하러 가는 내가 할 말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런데 어제 또 언니와 함께 빵을 드시고 있는 엄마를 보게 된 거고 결국 나는 묻고 말았다. 

“빵은 왜 사는 거야?”

“아침에 엄마 바쁜데 빵에 쨈을 발라드리면 좋아”라는 언니의 말에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고야 말았다. 치매 관련된 도서, 달랑 5권 읽은 깜냥으로.

“빵은 화도 더 나게 하고 뇌에도 안 좋아. 계란도 있고 쑥떡도 있잖아”라고 말이다.


언니 얼굴이 굳어지고, 이 와중에 엄마는 내가 사드린 여름 샌들이 좋다고 연신 말씀하시고, 말을 내뱉자마자 나는 후회스러운 마음을 감당할 길 없으니 어찌하오리까.

일주일에 두세 번, 얼굴 내미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거였지.


 아침 일찍 일어난 엄마가 집안을 배회하다가 넘어지지는 않을까 엄마 방에서 나는 기척에 신경을 곤두세우면서 자는 언니가 잠은 온전히 자겠으며, 주간보호센터에서 저녁 6시에 오시면 목욕에 산책에 저녁 챙겨드리기 등등 주무시기 전까지 함께하는 언니다.

간혹 안 주무시겠다 잠투정을 할 때도 있고 새벽 4시에 일어나는 날도 있고 기저귀에 크게 실수해놓기도 하는 엄마와 함께하는 언니에게 내가 그만 지적을 해 버린 거다.

엄마가 한 번씩 생강짜를 놓을 때, 엄마의 취침과 기상에 변화가 생길 때, 언니도 나이가 있는지라 며칠이 피곤할 텐데, 게다가 형부가 사업을 접고 아파트 경비원으로 취직한 지 2달째 형부도 적응기라 그 스트레스를 언니가 감당하고 있을 텐데 참 생각할수록 내가 잘못했다. 


7년 전, 엄마는 노인주간보호센터를 혼자 걸어서 갔고, 세탁소에 빨랫감도 맡길 줄 알고, 혼자 밥도 해 드셨다. 자식 넷은 엄마에게 매일 전화하는 걸로 효를 다하고 있을 때였는데, 어느 날은 주간보호센터에 있어야 할 엄마가 집이란다. 늦잠 잤다고 해서 그럼 빨리 씻고 센터 나가시라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다음날 비슷한 시간에 전화를 했는데 또 집이다. 이상하다 이틀 연속 센터에 가는 시간을 놓치고 침대에 계셨던 거다. 


놀란 4남매는 회의를 해서 오빠와 살림 합가를 결정하고 신속하게 엄마와 오빠네는 한 식구가 되었다. 

그리고 6개월쯤 지났을까. 오빠가 가족회의를 제안했다. 엄마를 전담하기 힘드니 주간보호센터에 가지 않는 주말은 딸 셋이 돌아가며 모시는 걸로 하자는 거였다. 언니와 동생집은 거리가 있어서 둘은 히든카드로 놓아두고, 주로 내가 금요일 저녁에 엄마를 모시고 와서 일요일 저녁에 오빠 집으로 모셨다. 그래도 언니, 동생이 한 달에 한 번은 시간을 내려 애썼고, 일요일에는 오빠가 엄마를 모셔가는 일이 많았다.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금요일 저녁 학원 수업을 마치고 용산으로 엄마를 모시러 갔는데, 엄마가 차 안에서 낮게 깔린 소리로 우신다. 이 집 저 집 다니는 신세가 처량하다고. 말로는 어디에 있어도 좋다고 하셨지만 아니었다. 머리를 수그리며 눈물을 닦는 엄마의 가냘픈 모습이 애처로워 내 눈에서도 눈물이 솟구친다. 운전대를 두 손으로 꽉 잡고 앞만 보고 한참을 달리고 나서 웃으며 위로해 드렸다.


“ 엄마에게는 집이 많아서 그래. 자식집이 모두 엄마집이야.”


누구도 전담해서 모시기 힘든 상황이었다. 4남매 모두 직장을 다니고 있으니 일주일 내내 엄마를 케어하기는 몸과 마음이 지친다. 치매가 아니어도 고집불통에 한 성깔 하는 엄마를 전담하기는 쉽지 않았다.

일요일에 학원 수업을 하고 있을 때라 남편에게 엄마를 맡겨두고 수업 끝나면 집으로 날아오기 바빴다. 마당에 있는 의자, 탁자, 화분 할 거 없이 한쪽으로 모아 쌓아두는 게 엄마 일일테고, 남편은 다시 원위치시키느라 실랑이하고 있을 걸 빤히 알기에.


또 그 후, 1년쯤 지났을까 오빠가 가족회의를 하자고 한다. 6개월씩 돌아가면서 모시자는 안건이다. 오빠와 올케가 어지간히 힘든 모양이다. 엄마의 치매가 심해질수록 사위나 며느리에게는 욕까지 해대니 견디기 쉽지 않았을 거다. 그래서 우리 집에서 시작했다. 살다 보니 2년 정도 계셨다. 그리고 서산 언니 집에서 2년 그리고 다시 오빠 집에서 3개월쯤 사셨는데 주말에 우리 집에서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대퇴부 골절이란다.  


4개월 병원에서 치료받고 오빠 집으로 모셨다. 주말엔 우리 집에 오셨는데 걸음이 불편하니 아파트에 있어야 해서 우리 집은 마당에 계단에 장애물이 많은 집이라 어쩔 수 없었다. 대신 일주일에 두 번 화요일 목요일에 엄마를 전담하기로 하고 6개월 살았을까. 


오빠가 분양받은 아파트로 들어간다니, 어쩐다. 여러 의견이 오가다가 서산에서 사업을 접은 언니가 이 집으로 이사 오고 오빠는 분양받은 집으로 가는 걸로 엄마는 그대로 이 집에서 쭈욱 사시는 걸로 결론이 났고 그런 생활이 3개월째인 거다.  


이 집 저 집 평일과 주말을 쪼개어 살았던 엄마가 가장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지금, 언니의 공로가 두드러지는 이 시점에서 언니 심기를 불편하게 했으니 댐을 무너뜨리는 건 작은 균열이라 했던가 이런저런 생각이 많다.

그리고 미안한 마음 가득 담아 카톡 하나 날렸다.

“비 오는데 간장게장 먹으러 가지 않을래?” 


엄마의 밤을 지키는 언니의 애씀에 나의 망발이 무거운 티끌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오늘도 누군가에게 무심코 날렸을 무거운 티끌을 직감한다.

그러니 늘 깨어있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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