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윤 작가의 책 <럭키>를 읽는데 이런 내용이 나온다.
한 친구가 내게 인생 상담을 청한 적이 있다. 자신은 분명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고 있는데, 창업한 지 3년이 다 됐는데 나아지는 것도 없고 뚜렷한 성과도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하루 일과를 물어봤다. 그는 창업한 회사에서 열심히 일했고, 새로운 파이프라인을 만들기 위해 부업으로 쇼핑몰 채널을 운영했고, 퇴근 후에는 영어와 중국어도 공부했다. 바쁜 와중에 인간관계도 잘 챙겼고 자신의 건강을 위해 헬스와 요가도 빠뜨리지 않았다. 커피도 좋아해 바리스타 자격증 취득을 위한 강좌도 들었다. p. 102
많은 책과 강연에서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을 잘 정해야 한다고 한다. 럭키를 쓴 김도윤 작가는 여기에 한 마디를 덧붙여 방향을 잘 정해야 결국 속도가 붙는다고 말한다. 물체에 가속도가 붙었을 때 방향을 바꾸면 물체에 저항이 생겨 속도가 떨어지는 물리학의 법칙처럼, 삶에서도 너무 많은 일을 하면 원하는 만큼의 성과를 이룰 수 없다고 말한다.
일부분 고개가 끄덕여진다. 4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가지치기가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삶을 살았다. 체력이 부족해서 이것저것 너무 많은 것을 하려고 하면 머지않아 몸이 고장 났다. 수험생 때에도 오랜 시간 앉아서 공부를 하면 다리가 저리고 종아리 안쪽에 피가 고이기도 했다. 잠을 줄여가며 공부를 한 것도 아닌데 부족한 체력의 한계를 정신력으로 극복하려다 보니 얼굴에는 생기가 별로 없었다.
내 체력을 알기에 뭔가를 시작하는 것은 늘 부담이 되었다. 자연스레 이것저것 많은 일을 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일단 시작을 하고 나면 끈기 있게 최대한 정성을 다했다.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시간이 조금 걸리고 가끔 효율성이 떨어질 때도 있지만 스스로 만족할 수 있을 만큼 완벽하게 해내고 싶었다. 이만큼 할 수 있다고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예민한 성격으로 일단 시작하면 적응하는데 시간과 에너지가 상당히 필요해서 변화를 좋아하지 않았다. 학창 시절 학원을 다닐 때 같은 반 아이들이 한 명, 두 명 그만두기 시작해서 결국 나만 남아 있게 되었을 때에도 계속 묵묵히 다녔다. 선생님이 그만두시고 다른 반과 통합이 될 때까지 새들이 날아간 낡은 웅덩이를 지켰다. 어찌 보면 우직하고 어찌 보면 미련했다. 내면의 불안함과 걱정이 많았기에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이 더 두려웠던 것 같다.
결혼을 해서도 큰 변화 없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삶을 살았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난 후로는 자연스레 삶의 가지치기를 고민하게 되었다. 시간과 에너지의 분명한 한계가 느껴졌다. 내가 그동안 해오던 것을 모두 그대로 유지할 수 없었다. 내 삶을 Ctrl+c 하고 뒤이어 내용을 추가해 보려고 했는데 생각처럼 잘되지 않았다. 어느 순간 왼쪽 다리인 마음이 먼저 발걸음을 옮겨도, 오른쪽 다리인 몸이 한 박자 어긋나며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스트레스가 심했고 여기저기가 아프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감당할 수 없는 자신과 주변의 환경에 화가 났다. 이것저것 모두를 해내려고 하다 보면 졸작이 되었고 만족스럽지 않았다. 결국 가지치기를 하며 내 삶을 다시 다듬어야 했다.
처음에는 잘 키우고 있던 가지를 자를 때 미련이 뚝뚝 남았다. 아까운 생각과 스스로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가지치기를 꾸준히 하다 보니 점점 더 과감해진다. 가지를 하나둘씩 잘라낸다고 나무가 죽지 않는다는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내 걱정과는 달리 오히려 더 잘 자란다.
과거에는 기쁨보다는 슬픔에 기울어진 감정으로 자연스레 떨어진 가지도 하나하나 살펴보며 의미 부여를 했다. 일상 속 약간의 우울감은 에너지를 갉아먹었고 가끔 아무것도 하기 싫은 무기력한 상태가 되기도 했다.
삶의 가지치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지나치게 의미 부여를 하며 미련하게 붙잡고 있던 것들을 자연스레 내려놓게 되었다. 내면의 대화를 하며 타인이 아닌 스스로의 기준으로 정리가 필요한 가지를 골라낸다. 그리고 아낀 시간과 에너지를 더 중요한 것들에 집중한다. 수시로 가지치기를 하니 변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고 훨씬 편안해졌다.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는 제한된다. 그렇더라도 많은 자기 계발서에서 말하는 것처럼 성취를 위해 관련도가 떨어지는 일을 모두 제거하며 살고 싶지는 않다. 다른 가지를 모두 잘라내고 한두 가지만 남겨 놓으면 남은 가지는 잘 자랄 테지만 나무가 볼품이 없다. 그보다는 때때로 적당히 가지치기를 하며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의식적으로 조절하며 살아가려고 한다. 차를 타고 지나가다 보면 그 모습이 똑같은 나무는 없다. 그래서 더 아름답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