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루 Dec 08. 2021

"어린이 통장은 만드는 데 1시간이 걸려요"

애들 용돈 통장 만들기 참 힘들다

이따금 시댁을 방문하거나 친정을 방문하면 손주들 왔다고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용돈을 주신다. 큰아버지 외삼촌 등도 말할 나위 없다. 그렇게 받은 용돈은 여느 엄마들이 그러하듯 결국 내 주머니로 들어오게 된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아이들이 용돈을 받자마자 나에게로 갖다 주기 때문에, 내가 받아가는 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큰 아들이 머리가 굵어져서인지 요즘 불만을 표시하기 시작했다. 자기가 받은 돈인데 자기가 못 쓴다는 것이다. 엄마가 저금해준다고 해도 영 마뜩잖아했다. 별 수 있으랴? 믿기 힘들면 스스로 저금하도록 시키는 수밖에.

우리 집과 가장 가까운 은행은 어른 걸음으로도 15분은 가야 은행이 나오기 때문에, 나는 ATM기를 활용하기로 했다. 하지만 기존에 아이들 통장과 다른 은행이었다. 수수료 없이 이용하려면 해당 은행의 통장이 필요했다.

은행 콜센터에 전화해서 필요한 서류를 확인하고, 아이들 도장과 내 신분증을 챙겼다.

엄마가 통장 만들어 올 테니, 너희는 용돈 받으면 이제 스스로 자기 통장에 저금하는 거야, 알겠지?"


은행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2시쯤. 대기인원이 15명쯤 되었다. 은행 입구에는 코로나로 인해 '9:30~3:30까지 단축 운영'한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은행 위치가 상업지역이라서 자영업 하시는 고객이 많은가 보다고 생각했다. 30분쯤 기다렸을까?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아이들 통장 만들려고요"

내 말에 은행원은 적잖이 당황했다.

네? 지금 월 말이라 제일 바쁜 때인데... 아이들 통장 만들려면 1시간은 걸려요. 그런데 저희가 지금 단축 운영을 해서 2명 통장은 만들 시간이..."

은행은 월 말이 바쁠 거라는 건 미처 생각지도  못했다. 예전에 내가 다닌 회사는 외려 월 초가 바쁘기도 했고, 전업 주부가 되고 나서는 월 중 가장 바쁜 때도 없이 몇 년을 지내다 보니, 오늘이 월 중인지, 월 말인지 구태여 인지할 일도 없었다. 게다가 통장 하나 만드는 데 한 시간이 소요된다니...! 여기 한국 아니었나? 하는 생각과 그냥 집으로 가야 하나, 아이들에게 자신 있게 얘기하고 왔는데 뭐라고 하고 와야 하나, 월 말이 바쁘면 애초에 콜센터에서 월 말은 고객이 많으니 월 초에 가시라고 언지라도 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온갖 생각이 교차하는 가운데, 은행원이 오늘은 1명의 통장만 만드는 게 어떨지 제안을 했다.

그다음부터 쏟아지는 서류, 서류, 서류... 내가 지금 무슨 서류에 싸인을 하는 건지도 모르겠고, 왜 이 서류들이 서명을 요구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어느 하나라도 누락되면 아이 용돈 통장을 개설할 수 없다는 건 확실했다. 서류가 이렇게 많다는 건,  누군가가 맹점을 이용해서 이득을 취했거나 불만을 제기해서일 것이다. 경험상, 누군가가 미비한 서류나 설명 사이에서 분란을 일으키면, 재발 방지를 위해서 대가처럼 더 많은 서류와 절차가 생겨났으니까.


오로지 통장만 개설하는 데에 30분 정도 걸렸다.  은행 영업시간이 30분  남았으니 만들려면 하나 더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대기 고객은 10명이 넘게 남아 있었다. 창구 하나를 은행 영업 끝날 때까지 내가 차지하고 있는 건 기다리는 사람에게 예의가 아니다.  결국 남은  한 아이의 통장과 입출금 카드 신청은 다음에 와서 하기로 했다. 그야말로 입금만 되고, 출금은 은행 창구에서만 되는 통장이 만들어진 것이다.

과정이야 어찌 됐든, 나는 아이에게 너희의 용돈을 엄마가 가로챌 생각은 전혀 없으며, 너희의 용돈은 이제 스스로 저금하면 은행에서 안전하게 보관해줄 것이라고 말하는 당당한 엄마가 되었다. 앞으로 은행은 월 말에는 절대 가지 말아야겠다고 상기하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