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화성을 걸으며 정조의 꿈을 다시 생각하다
서장대에 오르는 계단은 가팔랐다. 비가 와서 미끄럽기까지 했다. 계단만 오르면 서장대에 도달할 수 있다는 안도감에 약간의 힘듦은 감내할 수 있었다. 정조는 서장대에서 본인의 친위부대 장용영의 훈련을 직접 지휘하며 위용을 과시했다. 제위 기간 개혁 군주로서 애민 사상을 바탕으로 조선 후기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왕으로 기록되고 있다. 하지만 아버지 사도세자가 묻혀 있는 현륭원을 지척에 두고, 어머니 혜경궁홍 씨를 모시고 화성행궁에서 살고자 했던 마지막 꿈은 이루지 못한 채 4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마치 비에 젖은 수장대가 정조의 아쉬움을 말해주고 있는 듯했다.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정조가 왕위에 즉위하며 신하들에게 내뱉은 일성이다. 영조를 부추겨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내몰고, 본인도 역적의 아들이라 왕위에 오를 수 없다고 간언한 노론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발언이었다. 고통 속에 죽어가던 아버지의 최후를 열한 살 어린 나이에 목격한 정조는 당시의 충격에서 오랫동안 벗어나지 못했다.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간 노론벽파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성군이 될 때까지 많은 시간 속마음을 숨겼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을 끌어안으며 화합과 소통의 정신으로 국정을 이끌었다. 조선 후기 가장 위대한 개혁 군주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이다.
비탈길 계단을 내려가 화성행궁에 도착했다. 입구에 신풍루라는 현판이 보였다. 신풍은 새로운 고향이라는 중국 고사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정조는 수원을 제2의 고향으로 만들고 싶었다. 아버지가 외롭지 않도록 이곳에 도시를 만들 계획을 세운 것이다. 주변의 집들을 이주시키고, 시장도 만들었다. 자급자족이 가능한 경제도시를 만들었던 것이다. 수원화성은 다른 행성에서 볼 수 없는 군사적 요새이기도 하다. 세자가 15살이 되면 왕위를 물려주고, 어머니를 모시고 이곳에 살면서 상왕 정치를 하고 싶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수원화성은 정치, 경제, 군사, 모든 기능을 갖춘 조선 최초의 신도시였다.
1795년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동시에 회갑을 맞은 해이다. 대규모 능행차를 준비했다. 말이 천 여필이나 동원됐고, 참여한 인원만 6천 여명에 달한 대규모 행차였다. 험난했던 고난을 극복하고 성군이 됐음을 아버지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누구도 왕권에 도전하지 못하도록 권세를 과시했다. 백성들에게도 왕의 건재함을 보여주고 싶었다. 용안을 백성들에게 보여주는 행위는 빛을 보여주는 것이라 해서 ‘관광’이라 한다. 관광의 중의적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길 수 있었다. 행차는 아버지의 능을 참배하고 화성행궁에 여정을 풀었다. 어머니의 장수를 기원한다는 의미의 봉수당과 늙는 것은 운명에 맡기고 편안히 살면 그곳이 고향이라는 뜻의 노래당도 보인다. 서울은 주상의 수도로, 수원은 상왕인 자신의 수도로 삼고자 했던 정조의 못 다 이룬 꿈이 새록새록 가슴을 저며 왔다.
행궁을 나와 방화수류정으로 발길을 옮겼다. 비가 오고 있었지만 완연한 봄이었다. 주변에 벚꽃이 활짝 피었다. 바람에 날리는 버들가지가 마치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처럼 우리를 반겼다. 방화수류정 아래 자리한 연못 용연은 봄꽃과 버들이 어우러져 아름다웠다. 정조가 노년에 이곳에서 살았다면, 일편단심으로 알려진 성덕임과 함께 꽃과 버들을 벗 삼아 정답게 거닐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연못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마치 두 사람의 애절했던 사랑을 슬퍼하는 눈물로 보였다. 아름답다고 알려진 야경은 비가 와서 보지 못했다. 못내 아쉬웠다. 용연에 비친 달을 보며, 하늘에 떠 있는 달이 만개의 개울을 비추듯 만백성에게 두루 혜택이 미치기를 바란다는 “만천명월주인옹’ 자호에 숨은 정조의 철학을 한 수 배우고 싶었는데 말이다.
수원행성은 두 번째 방문이다. 딸아이가 수원에 살고 있어 안내받아 방문한 적이 있다. 아내는 은퇴하면 수원에 와서 손자들을 돌보며 살자고 한다. 나는 별로 마음에 내키지는 않지만 손자들을 잘 보살피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무튼 아내가 원하는 일을 힘없는 내가 반대할 수 없으니, 우리 부부 말년의 거쳐는 수원이 될 확률이 높아 보인다. 화성행궁 노래당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정조는 부모에게 효도하기 위해 수원이라는 도시를 만들었는데, 나는 기껏 손자들을 돌보기 위해 수원으로 이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격세지감이다. 자식이 부모를 모시는 일은 옛 풍습이 된 지 오래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 이사를 가야 하는 시대이다. 안타깝지만 시대가 그렇게 변한 걸 어쩌랴. 맞벌이가 대세고 손자들은 누군가가 돌봐줘야 한다. 자식들은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할머니 할아버지라고 읍소한다. 믿음을 저버릴 수 없는 우리는 기꺼이 좋은 유전자를 전파하기 위해 태어난 호모 사피엔스 종으로서 역할을 다하려 한다.
통합과 소통의 달인이었던 정조는 세종대왕에 이어 조선후기의 성군으로 꼽힌다. 정조가 10년만 더 살았다면 조선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조선의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을 것이고, 수원도 국제적인 상업도시가 됐을 것이다. 왕위를 내려놓고 이산으로 돌아와 소소한 일상을 보내고 싶었던 꿈도 이루었을 것이다. 정조의 예상치 못한 죽음이 조선 몰락의 시작이었다. 군주의 역할이 나라의 흥망성쇠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