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의 비선 실세 손탁

정동길을 걸으며 손탁의 흔적을 찾다

by 더글라스김


궁중축제가 열리고 있는 덕수궁에 커피 향이 흐른다. 커피 향을 따라 걷다 보니 커피시음회가 정관헌에서 열리고 있었다. 정관헌은 덕수궁 최초의 서양식 건물로 ‘고요히 바라보는 집’이라는 의미다. ‘황제의 취미회, 양탕국 커피라운지’라는 주제로 바리스타가 핸드드립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커피 맛이 부드럽고 깊이가 있어 황제가 마시던 커피라 할 만했다. 고종은 커피를 좋아해 정관헌에서 주로 ‘서양에서 온 탕국’ 커피와 다과를 즐겼다. 덕수궁을 내려다보며 상념에 잠겨 커피를 마시고 있는 고종을 떠올렸다. 고종에게 커피를 소개하고 커피를 직접 내려 준 여인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마리 앙투아네트 손탁이다. 프랑스 알자스에서 태어났고, 프로이센 전쟁으로 알자스가 독일령으로 편입되면서 국적은 독일인이다. 러시아 베베르 공사의 친인척 자격으로 31세에 입국해, 외국인 의전을 담당하는 왕실전례관으로 근무한 것 이외의 정보는 알려지지 않았다.

사교성이 뛰어난 손탁은 민비에게 서양 문물을 소개하고 화장법도 알려주며 가까워졌다. 영어는 물론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에 능통했으며 한국어도 잘하는 팔방이민이었다. 고종부부로서는 외국 공관이 늘어나고 조선을 방문하는 외교사절들을 상대할 사람이 필요했고, 손탁은 두 사람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 고종부부가 창덕궁에서 경복궁 건천궁으로 거처를 옮겼을 때 손탁에게 서양식 인테리어를 맡겼다. 침대와 식기류, 양탄자 등이 처음으로 궁에 설치된 것도 손탁이 주도했다. 기록에 의하면 황실의 내탕금 관리도 맡겼으며, 고종이 개인적으로 소유한 건물도 손탁 명의로 등기했을 정도로 신뢰했다고 한다.

정관헌 뒤쪽 문으로 나가면 고종의 길과 이어진다. 을미사변으로 민비가 일본군에 의해 처참히 살해되는 것을 목격한 고종은 일본의 감시 속에 숨죽여 지내다가 4개월 후 러시아 공사관으로 망명하게 된다.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을 차지하기 위해 각축전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러시아공사를 택한 것은 손탁의 역할이 컸을 것이라고 당시 일본군 정보자료는 전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손탁을 러시아의 스파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고종이 러시아공사에 머무르는 동안 손탁은 고종의 가장 가까이에서 헌신적으로 보살폈다. 서양요리와 커피 등을 제공하며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고종과 독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석조전 앞을 지나며 잠시 생각에 잠긴다. 고종은 40여 년 동안 왕으로 있었지만 아버지 대원군의 섭정과 민비일가의 국정개입으로 자기 정치를 해본 적이 없었다. 신하들의 강력한 환궁 요청으로 일 년 후 경복궁이 아닌 덕수궁으로 환궁한다. 덕수궁 주변에 외국 공사들이 많아 유사시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다. 복귀 후 대한제국을 선언하고 황제즉위식을 거행한다. 다른 나라들과 대등한 관계에서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열강들에 의해 나라의 운명이 좌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중립국이 되는 것이 목표였다. 석조전을 서양식 건축물로 짓도록 한 것도 이 때문이다. 한성의 모습을 바꾸기 위해 워싱턴을 벤치마킹했다. 한성전기회사를 설립하고 부속사업으로 전차를 들여왔다. 종로에 가로등까지 불을 밝혔다. 광화문과 종로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한성의 중심 도로를 남대문까지 늘리고, 소공로를 개통해 현재 시청이 있는 소공동을 정치경제의 중심지로 바꾸었다. 이 모든 일들이 황제즉위 3년 만에 바뀐 서울의 모습이자 고종의 개혁드라이브였다. ‘숭실사학회’에 의하면 이 과정에서 손탁은 황실의 이용익 등을 도와 많은 외교적 역할을 했다고 전한다.

‘한국민족문화재단 대백과사전’에 의하면 고종은 아관파천 이전인 1895년 손탁에게 조선의 독립을 위해 노력한 대가로 월산대군이 살았던 한옥을 객실 다섯 개의 양옥으로 개조해 하사했다. 객실은 주로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이 이용하고, 레스토랑 겸 커피숍에는 정동구락부를 만들어 주한외교관들의 사교장으로 활용했다. 맛있는 음식과 고급 와인, 값비싼 샴페인, 하바나 시가까지 제공되는 파티였다. 마땅히 갈 곳이 없었던 외교관들은 손탁의 초청에 기꺼이 응했다고 한다. 물론 이곳에서 입수된 정보는 고종과 러시아공사에 보고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경복궁에 고립된 고종을 러시아 공사로 망명시키기 위한 논의는 물론 대한제국의 개혁 청사진도 이곳에서 논의된 것으로 보인다. 손탁의 존재가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일이다. 대한제국 선포 후 고종은 손탁에게 감사의 뜻으로 양관을 2층 벽돌 건물의 신식호텔로 개축해 주었다. 한국 최초의 서양식 호텔로 기록되고 있다.

오후에는 손탁호텔 흔적을 찾고 싶었다. 구글지도를 이용해 찾던 중 이화여고 주차장 입구에서 손탁호텔 표지판을 발견했다. 호텔경영 전공자로서 첫사랑의 흔적을 찾은 것처럼 설렜다. 호텔의 뿌리를 찾은 기분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호텔 주인이었던 손탁은 고종의 신뢰에 힘입어 영향력이 무제한적으로 커졌고, 보이지 않는 권력의 실세가 되었다. 국가 간의 외교 관계가 손탁에 의해 어느 정도 조종되었다. 외국인들이 조선 정부로부터 허가나 승인을 빠르고 확실하게 받으려면 그녀를 찾아야 했다. 그녀가 개입하면 결과가 긍정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눈 밖에 난 사람은 황실의 근처에도 접근할 수 없었다. 1904년 일본과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손탁은 한국을 떠났다가 2년 후에 돌아온다. 비선으로 서방에 고종의 뜻을 전달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미 조선은 영국과 미국의 지원을 받아 청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외교적 노력이 빛을 발하지 못했다. 중명전에서 설계했던 헤이그 밀사 파견도 그런 이유에서 실패로 돌아갔다.

고종은 이름 없는 이방인 여성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냈고, 때론 의지하기도 했다. 그녀는 24년 동안 조선에 살면서 고종의 중요한 결정에 보이지 않게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렇다고 무조건적인 희생만 한 것은 아니다. 비선실세로서 충분한 권력을 누렸고, 사교계의 여왕으로 군림하며 화려한 삶을 살았다. 호텔을 하사 받은 것은 물론이고, 각종 이권에 관여했다. 조선을 떠날 때는 호텔을 프랑스인에게 팔아 상당한 부를 축척한 것으로 보인다. 손탁이 떠난 후 호텔영업은 순조롭지 않았고, 이화학당이 인수해 기숙사로 사용했다. 호텔 표지석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화려했던 그녀의 인생과 대비되어, 물거품으로 끝나버린 대한제국이 애틋함으로 가슴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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