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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창복 Feb 02. 2023

노는 형들과

   중학생이 된 뒤로 밥 먹고 잘 때 빼고는 거의 독서실에서 살았다. 세탁소에는 있을 곳도 딱히 없고 잠자는 방에 가봐야 혼자 썰렁했다. 독서실에 가면 전용 책상도 있고 불빛도 환하고, 무엇보다 다들 조용히 공부하니까 분위기가 잡혔다. 남녀 열람실은 2층과 3층으로 구분되고, 중학생과 고등학생은 벽으로 구분되어 각기 다른 방에서 공부했다. 가끔 엎어져 자기도 하지만 오래 자지는 못했다.

   학교 마치고 집에 오면, 엄마는 미리 앞집 슈퍼 하드통에 넣어놓은 포도 한 송이를 가져다주었다. 하드통에서 세탁소로 오는 고새 송송 작은 물방울이 맺혀 더 싱그러워 보였다. 포도송이를 스텐 국사발에 받아 들고 가겟방으로 들어가 조그만 흑백 텔레비전을 켰다. 화면이 나오려면 좀 기다려야 되지만 먼저 채널을 2번으로 탁탁 돌려놓고 포도를 먹기 시작했다. 채널 2번은 미군방송이라 낮에도 나왔다. 알아듣지는 못해도 음악방송이 많아서 재밌었다. 포도를 다 먹으면 텔레비전을 끄고 교복을 갈아입고 독서실로 향했다.


   독서실에는 공부하는 애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와서 노는 형들도 많았다. 형들은 가끔 열람실에 들어가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엎드려 잤다. 깨어있을 때는 주로 독서실 옥상에 올라가 있었다. 모여서 짤짤이도 하고, 담배도 나눠 피우면서 가끔 거시기한 화보 책도 돌려봤다. 한쪽에서는 웃통을 벗고 아령을 열심히 들며 ‘가빠’를 자랑했다. 언젠가 외국영화에서 본 교도소 장면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이 되면 옆 건물 2층에 빼꼼히 열린 여관 창문을 훔쳐보는 일도 형들의 중요한 일과였다. 가끔 옥상이 소란했다. 그럴 때마다 가보면 ‘아이나’ 한 줌 먹고 벌건 얼굴로 의자에 드러누워 거품 물고 겔겔 거렸던 형이 있었다. 당시 형들이 아이나로 불렀던 그 알약이 신경안정제라고 했다. 후일 내가 어른이 되어 먹어봐서 아는 결핵약 이름도 아이나였는데, 왜 이 약을 먹고 그랬는지 알 수 없었다.     

   학교에서의 폭력은 닭싸움하듯이 교실 뒤에서 후다닥거리다가도 선생님이 ‘뜨면’ 바로 수습이 됐다. 선생님들의 폭력은 한문 선생님 같은 예외도 간혹 있지만 대체로 교실 안에서 공개적으로 행해지는 절제된 폭력이었다. 동네 형들의 폭력은 패거리의 양상을 띠었다. 싸움도 패거리 간의 조직 대결로 벌어졌다. 나는 독서실에서 안전한 거리를 두고 ‘패거리’ 내부의 일상을 엿볼 수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아는 형들이었다. 절반은 우리 동네 형들이고, 절반은 딴 동네 형들이었지만 모두 미아국민학교를 졸업한 선배들이었다. 선배라 해봐야 나보다 두어 살 많았다. 하기야 중학생 시절 두어 살이면 큰 차이다. 어쨌든 형들하고 다 친했는데 형들은 나에 대한 공통된 태도를 보였다. 뭐랄까, 쟤는 건드리지 말자, 물들이지 말고 보호해야 한다는 자기들끼리의 암묵적인 약조 같은 걸 했을 거 같았다. 물론 순전히 나의 뇌피셜이다. 암튼 불량한 형들이었지만 나한테는 그리 불량하게 느껴지지 않은 형들이었다.


   중3 겨울, 연합고사를 마치고 한동안 독서실 형들과 함께 몰려다니며 놀았다. 자전거 체인을 휘두르며 싸우는 살벌한 패싸움도 구경하고 일명 ‘완타치’ 결투도 패거리의 일원으로 지켜봤다. 술도 같이 먹었다. 딴 건 몰라도 술 먹을 때는 더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집안 내력인지 난 술을 잘 마셨다. 진짜 재밌었던 건 형들과 “메밀묵 사~아려, 찹쌀떡”을 번갈아 외치면서 새벽까지 동네 골목을 누볐던 일이었다.

   희뿌옇게 동이 터오면 장사를 마치고 어디론가 들어가 술을 마셨다. 술기운에 흥이 오르면 꼭 그 춤을 추는 형이 있었다. 기마 자세를 잡고 배꼽쯤에 있는 혁대의 버클을 왼손 엄지손가락으로 걸어 덮고는, 오른손등을 이마에 살짝 대고 8자를 그리듯이 엉덩이와 고개를 함께 흔든다. 그러다가 펄쩍 뛰면서 두 손으로 양 무릎을 따닥, 번갈아 치고 가슴께 올라와서 손뼉 치듯 두 손을 마주친 다음, 오른손을 머리 위로 휙 날리면 그제야 두 발이 바닥에 닿는다. 다들 소리를 지르며 환호했다. 그 춤을 우린 ‘용춤’이라고 불렀다. 따라 해보려고 틈나는 대로 연습해 보았지만 체공 시간이 턱없이 부족해서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그들 중에 형기 형이 있었다. 형기 형은 수시로 나를 챙겼다. 형은 나에 대한 모종의 책임감을 가졌던 것 같다. 술에 취한 형들이 거칠게 대한다 싶을 때마다 분위기를 바꿔서 무마시켰다. 이도 여의찮으면 나를 슬쩍 빼내 집으로 먼저 보냈다. 진학을 앞둔 중3 겨울방학은 무척 길었다. 3월 고등학교 입학 때까지는 중간에 개학도 봄방학도 없이 쭉 방학이었다. 그 긴 방학 기간은 내 일생에서 전무후무한 일탈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안전한’ 일탈이었다. 그 형들은 다들 뭐 하고 지낼까.     


   뺑뺑이 추첨 결과 신일고등학교로 가게 되었다. 학교가 수유리 변두리에 있었지만, 신흥 명문고였다. 예비소집일에 처음 가봤는데 학교가 엄청나게 컸다. 교문에서 교실까지 한참 걸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교문을 지나 올라가는 길 양옆에 개나리와 진달래가 만발한 풍경이 연세대와 아주 비슷했다. 몇 가지 신상 관련 서류와 연합고사 성적표를 들고 안내 화살표를 따라갔다. 검정 뿔테 안경을 쓴 깐깐한 인상의 선생님이 멀리서부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고문(古文) 과목을 담당하고 입시전략을 짜는 베테랑 선생님이라는 걸 입학 후에 알았다. 

   가져간 서류와 연합고사 성적표를 무심하게 쑥 내밀었다. 선생님은 성적표를 보고 내 얼굴을 빤히 보더니 위아래를 훑는다. 성적표를 다시 확인한다. “공부는 잘하는 놈인데 …….” 의아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며 말꼬리를 흐렸다. 꺾어 신은 구두 하며, 불량한 행동거지에 날티 나는 안경까지 쓰고 떨떠름하게 티꺼운 표정을 하고 서 있는 놈이 내민 성적표가 도저히 믿기지 않았던 거였다.


#미아리의추억 #중항생 #독서실 #미군방송 #완타치 #메밀묵 #찹쌀떡 #연합고사

류해윤_농촌마을에 겨울눈_종이에 아크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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