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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창복 Feb 02. 2023

기억하고 싶지 않은 담임

   국민학교 담임 중에 애틋하고 각별한 기억은커녕 아예 기억조차 없는 선생님이 5학년 담임이다. 그런데도 떠오르는 것이 있다면 그건 틀림없이 좋지 않았던 기억일 거다. 평소에도 밝고 친절한 기색이 없는 분이었지만 항상 심통이 나 있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중키에 덩치가 좀 있었고, 얼굴도 좀 퉁퉁한 편인데 팽팽할 나이는 아니어서 좀 늘어져 보였다. 불독을 꼭 닮았다. 5학년을 마치는 종업 날이었다. 그날따라 오전부터 선생님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반장인 나는 신경이 쓰여서 담임 근처를 얼쩡댔다. 담임은 나를 보더니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는데, 분명 나무라는 말투였다.

   “오늘이 마지막 날인데 내 선물은 준비했니?”

   아차 싶었지만 동시에 ‘어떻게 이걸 직접 얘기할 수 있지?’ 하는 당혹스러운 마음이 죄스러움을 눌러버렸다. 하지만 곧 머리를 긁적이는 것으로 반장의 책무를 인정하고는, 바로 애들을 불러보았다. 부반장과 회장, 부회장, 그리고 눈에 띄는 미화부장까지 애들 다섯이 모여 사태가 심각함을 공유하고 대책을 의논했다. 각자 가진 돈을 털기로 하고, 늦었지만 빨리 선물을 사 오기로 했다. 문제는 빨리 서둘러야 하는 거였다.

   성수와 내가 함께 선물을 사 오기로 하고, 둘은 길음시장으로 달렸다. 성수는 전학 온 아이인데 키도 머리 하나는 더 크고, 2부 머리를 하고 있어서 중학생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학기 중간에 왔으니 제일 끝 번호인 68번이었는데, 키로 따져도 그 번호가 마땅했다. 성수는 전학 와서도 쭈뼛대지 않고 잘 어울릴 정도로 서글서글한데다가, 앞니 두 개가 앞으로 밀려 나온 모습이 더 착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공부도 잘했다. 뛰어가면서도 뭘 살지 의논했는데, 항상 더블 버튼의 양복을 즐겨 입는 담임의 취향을 떠올리고는 와이셔츠를 사기로 바로 의견 합치를 보았다.

   치수를 알 수는 없었지만 두 손을 모아 목둘레를 어림짐작해 보이고, 지나가는 아저씨를 지목해서 사이즈를 확정했다. 옷 가게 아저씨가 골라준 넥타이까지 챙겨서 선물 봉투에 담으니 안도감이 들었다. 선물 고르는 데 시간을 허비하지 않은 탓에 약간의 시간 여유가 있었고 돈도 조금 남은 터에, 자잘한 소품을 올려놓고 파는 길거리 리어카 앞에 섰다. 이것저것 살피다가 조그만 액자 하나를 골랐다. 사진을 넣을 수 있는 예쁜 액자였다. 와이셔츠보다도 어쩌면 액자가 우리 마음을 더 잘 전달할 것 같다며, 자신들의 세심함에 스스로 흐뭇해하면서 두 머슴애는 뿌듯한 미소를 나누었다. 임무를 무사히 마친 우리는 달려서 교실에 들어왔고, 자연스러운 타이밍에 선생님께 선물도 잘 전달하였다. 선생님도 모처럼 환하게 웃으며 좋아했다.      


   종업식이 끝나고 운동장에서 태권도 수련도 마치고 집에 가려는데, 책상 서랍에 신주머니 두고 온 게 생각나 털레털레 교실로 다시 오게 되었다. 신주머니를 챙겨 교실을 나가다가 우연히 담임 책상으로 눈길이 가게 되었는데, 책상 위에 바로 그 액자가 남겨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설마 했지만, 구겨진 책상보와 어질러진 책상 위에 그 액자가 나동그라져 있었다. 너무 마음이 아팠다. 액자가 색깔도 노란 것이 크기도 작아서 더 애처로웠다.

   특별한 정표가 될 것이라고 여겼는데 이 액자만 버리고 가다니, 화가 났다. 우리 담임 선생님만 반 학생들에게 선물을 못 받았다고 교무실에서 면목이 없을까 봐 죄송스러웠던 마음,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애들과 마음을 모아 서둘러 선물을 장만하느라 오전 내내 부산했던 마음들이 액자와 함께 다 내팽개쳐졌다는 생각이 들자, 화가 났다. 나는 버림받은 액자를 그대로 버려두고 올 수가 없어서 집으로 가져왔다. 사진을 넣고 싶지도 않아 빈 액자인 채로 한동안 책상 위에 두었다. 담임 선생님을 더 만날 일이 없다고 생각하니까 기분은 조금 나아졌다.     

   국민학생이면 아직 어린애들이긴 하지만, 5학년 정도 되면 어느 정도 사리 분별은 되는 나이다. 그림자도 밟으면 안 되는 선생님이라 앞에서야 깍듯하게 굴지만, 돌아서면 애들끼리는 시시덕대며 선생님 흉들을 다 보았다. 무턱대고 버럭 화부터 내는 선생님, 공부 잘하고 잘사는 애들만 좋아하는 선생님, 심지어 돈 밝히는 선생님 등등, 선생님에 대한 평판도 애들 사이에서는 빤했다.

   그러고 보면, 5학년 담임 선생님이 그렇게 특별히 나쁜 선생님이었던 것도 아닌데, 조그만 액자 하나가 뭐라고 마음 한구석에 멍처럼 오래 남아있었던 걸까. 액자에 우리 반 애들이 찍힌 단체 사진이라도 넣어 간직하면 좋겠다는 소박한 바람이 무시당했다는 무안함을 느껴버리고, 값나가는 물건이 아니라고 내팽개친 담임의 속물근성을 보아버린 탓이 아니었을까. 중년에 접어든 선생님이야 깜빡 잊었을 수도 있고 딱히 필요치 않아 별생각 없이 두고 간 것일 수도 있었지만, 이제 사춘기를 앞두고

 예민해지기 시작하는 소년의 마음에서는 그냥 지나쳐지지 않았다. 서서히 속내가 여물어가던 시기였다.    


#미아리의추억 #종업식 #선물 #액자 #속물근성 

류해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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