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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창복 Feb 02. 2023

물의 트라우마

   접싯물에도 빠져 죽는다고 하더니, 내가 딱 그 꼴이었다. 형편이 쪼들리고 처지가 몰리면 별일 아닌 상황에서도 낭패당할 수 있다는 걸 비유로 하는 말이지, 실제로 ‘접싯물’에 빠져 죽기야 하겠나. 그런데 아니다. 그렇단다. 언젠가 신문에서 읽은 거 같은데, 제집 목욕탕 욕조나, 마당이나 옥상에서 물놀이한다고 놓아둔 커다란 대야나 튜브로 만들어진 간이풀장에서, 아이들이 익사하는 사고가 자주 난다고 했다. 맞다. 정말이지, 실제로 내가 그랬다. 국민학교 2학년 때에 대중목욕탕에 가서 탕에 빠졌다.

   “목욕탕에 빠지다니, 아니 국민학생이면 탕의 물이 기껏해야 엉덩이나 허리 정도나 올 텐데 그 물에 빠지는 게 가능해?”

   그렇지만 사실이다. 어느 날 우리 집에 잊을 만하면 다녀가던 외가 친척인 형진 아저씨와 목욕탕엘 갔다. 아저씨는 온탕 냉탕 왔다 갔다만 하고, 아예 때를 밀 생각이 없다. 그저 탕에 들어갈 때마다 “으허~” 신음도 고함도 아닌 큰 소리를 내며 시원하다고 했다.

   그러다가 아저씨와 온탕에서 장난이 시작되었는데, 첨벙첨벙 까불다가 그만 발이 미끄러져 엎어져 버렸다. 갑자기 코로 물이 쑥 들어오더니, 순간 코에서 머릿속까지 철사로 후비듯 쎄해지면서 숨을 쉴 수도 없고 아득해졌다. 형진 아저씨는 뭐하냐며 대수롭지 않게 나를 내려 보고만 있었다. 곧 일어서겠지 했을 거다. 그래도 내가 안 일어나자 잡아서 일으켜보니, 그때야 물을 뿜으며 컥컥대더란다.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그냥 발을 바닥에 딛고 벌떡 일어나면 될 일인데, 순간 그게 안 되고 숨이 막힌 상태에서 공포에 사로잡혀 버둥대고만 있었다. 너무 창피하기도 하고, 그리고 그 공포가 떨쳐지지도 않았다. 그 후로 나는 물을 무서워하게 되었다. 목욕탕에 들어가서도 탕 안의 물이 가슴에만 차올라도 답답해지고 부담스럽다. 샤워기 밑에서 머리를 감을 때도 불안감이 올라오고, 그러다가 물이 조금 스며들어 콧속이 쎄해지면 그때의 공포감이 바로 떠오른다.

   일종의 물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긴 거다. 트라우마가 어떤 사건이나 사물로 인하여 마음의 충격을 입어, 그 당시를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속에서 분노와 공포가 생기는 현상이라고 한다면, 내가 그때 목욕탕 사건으로 물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긴 것이 틀림없다.     


   중학교 1학년 때였다. 골목 친구 재명이가 수영을 배우러 다닌다며 자랑했다. 좀 부러웠지만, 물이 무서운 나는 엄두도 나지 않고 낼 돈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재명이는 동네 애들과 함께 자기가 강습받는 수영장에 같이 가자고 했다. 다들 가겠다고 하고, 혼자만 빼기도 그래서 마지못해 따라나섰다. 종로2가에 YMCA가 운영하는 <스위밍 센터>라는 곳이었다.

   난 꼬맹이들이 노는 얕은 쪽 풀에서 목욕탕처럼 휘휘 걸어 다니기만 했다. 그러다가 쪽팔리면 앉아서 앉은뱅이 자세로 헤엄치는 흉내도 내보았다. 그러고 있는데 재명이가 반대편 성인용 풀에서 나와서는, 나를 불렀다. 싫다고 했지만, 그냥 와보라는 것이었다. 조금은 불안했지만 바깥에서 놀자는 거겠지 하며 갔는데, 갑자기 나를 풀 쪽으로 떠밀어 버렸다. 아!! 그 순간, ‘이제 죽는구나!’ 했다. 몸이 물에 잠기자 나는 본능적으로 수영장에 처음 들어와서 재명이가 알려준 동작을 했다. 두 팔을 머리 위로 뻗고 두 발로 물장구치며 전진하는 동작이었다. 내가 물속에서 할 수 있었던 발차기만 필사적으로 했다. 방향을 가늠할 수도 없고, 머리는 들 줄을 모르니 그냥 물에 처박고 발차기만 그냥 해댄 거였다.

   그렇게 한참을 해도 손에는 아무것도 닿지 않고, 차오르는 숨을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아 ‘아, 진짜 죽나 보다’ 하는데 손끝에 까칠한 수영장 벽의 감촉이 닿았다. 이제 살았구나 싶었다. 겨우 벽을 잡고 고개를 물에서 빼내 들었다. 재명이는 “와, 잘하네, 거봐 금방 되잖아.” 손뼉을 쳤다. 난 죽을 뻔했는데. 그 후로 난 목욕탕은 가도 평생 수영장에는 안 갔다. 그때 만약에 내가 발차기로 향한 쪽이 벽과 먼 방향이었다면 ……,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대학에 들어가자 교양체육이 필수과목으로 들어있었다. 종목을 살피다 보니 ‘수영’이 눈에 띄었다. 이참에 제대로 배워서 물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 보나, 하는 도전 의식이 고개를 쳐들었다. 과감하게 수강 신청을 했지만 결국은 학교 수영장에 두어 번 가고 말았다. F 학점을 받았다. 체육이 필수과목이라 이듬해 재수강을 해야 하는데 오기가 발동해 다시 수영을 선택했다. 역시 수영장 두 번 가고 접었다. 지금도 물에 가면 맥주병도 못되고, 그저 장도리 신세다. 여전히 물이 무섭다.


   어린 시절에 생긴 물에 대한 트라우마가 평생 남아있을 줄이야. 한번 트라우마가 생기면 당시 사건의 흑역사에 대한 방어본능이 작동하고, 흑역사의 원인을 제공한 어떤 대상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끓어오른다고 한다. 가볍게는 ‘이불킥’ 정도나 하고 말지만, 심하면 그 대상에 대한 증오감이 생기고 심지어는 당시의 자기 자신에 대한 증오로 변해 자기혐오에 빠지기도 한단다. 나는 다행히 그 정도는 아니었다. 항상 물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고, 웬만하면 물 근처에 얼씬거리지 않은 것으로 대처해왔다. 


#미아리추억 #수영 #대중목욕탕 #스위밍센터 #접시물 #트라우마

류해윤_금강산에 해금강_천 위에 아크릴릭_100*143cm_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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