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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창복 Apr 03. 2023

비스듬한 오후

[그림대화] (23)

     벽에 붙은 좁은 선반에 무척 다양한 사물들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다. 아마도 작가의 작업실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던 것들을 다 끌어 모아 그렸나보다. 세어 보니 그냥 볼 때와는 달리 그 가짓수가 꽤 많다. 무려 스무 개 가까이 된다.


     사물과 배경이 별개로 느껴지지 않는다. 아마도 사물들이 거의 일렬로 배치되어 앞뒤의 거리감이 거의 없어서 그런 거 같기도 한데, 사물들의 색도 서로 배척하지 않는다. 따스한 봄볕에 샤워를 하고 있는 거처럼 밝고 화사한 톤으로 다독거려져 있다. 사물들이 제각각 독립적인 입체감을 드러내기보다는, 전체적 조화 속에 잘 스며있는 것 같다.      


     모르긴 해도 작가에게는 친숙하고, 또 이러저러한 사연이 들어 있어서 살가운 물건들일 거다. 이것들을 왜 다 모아 그렸을까. 물어보니, 3년에 걸쳐 캔버스에 하나둘 사물을 덧붙여  그리다 보니 지금처럼 되었다고 한다.  


     ‘문득 눈에 들어오는 사물을 집어 선반 위에 가져다 놓는다. 사물의 윤곽을 잡고 색을 입히고, 이미 그려져 있는 다른 사물과의 관계를 살핀다.’ …… 작가는 사물을 그리며 사물과 대화를 했을 거다.


     ‘사물과 얽힌 인연의 순간을 되새김질한다. 사물과 인연이 시작된 장소와 시간, 그 때 함께 했던 인물, 그 순간의 공기와 냄새, 촉감과 느낌들을.’ …… 작가는 반추해낸 인연의 흔적들을 붙잡아두고 싶었나보다. 그런 것들이 그림 속에 배어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그림을 다시 보게 된다. 사물-작가 사이의 인연은 무엇이었을까, 궁금해진다.      


     정물화(靜物畵), 사물(Object)을 그린 그림이란다. 움직이지 않는다고 죽은 것은 아니다. ‘사물-인간’이라는 인연의 고리에서는 사물은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있다. 또 그 생생함을 붙잡아두고 싶은 작가의 욕망은 정물화로 실현되고 있지 않나.


     ‘과거’ 사물과의 인연을 ‘현재’ 정물화로 붙잡는다. ‘미래’에 변화할 사물은, 현재에 붙잡힌 과거(그림)와 다름이 확인되면서, 비로소 그 변화가 지각될 거다. 고요한 사물(靜物) 속에서 흐르는 시간을 느껴본다.  


#화가 #형 #류장복 #그림대화

비스듬한 오후, oil on linen, 65x140cm, 2016-18/ Jangbok Ry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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