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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창복 Apr 04. 2023

정물의 꿈

[그림대화] 24

     정물(靜物)이다. 탁자 위에 소소한 크기의 사물들이 놓여있다. 정물 너머엔 잿빛 빌딩과 그 좌우의 커다란 나무 두 그루들이 함께 원경(遠景)을 이루고 있다. 눈앞 정물들의 디테일과 뒤로 쭉 물러난 원경 사이에서 생겨난 ‘깊이감’이 아늑하다.     

     앗, 그런데 창 중간을 가로지른 창틀에 중절모를 쓴 남자가 보인다. 상체를 앞으로 잔뜩 기울인 채, 창틀 한복판에 좁게 패인 도랑 같은 길을 땅을 보며 걷고 있다. 순간 헷갈렸다. 창틀이 아닌가?

      오른쪽의 플라타너스 나무와 왼쪽의 헝클어진 나무가 창틀 아래에서 잘려나간듯 나무의 밑둥이 보이질 않는다. 원경이 있는 상단의 화면과 정물이 있는 하단의 화면이 연결이  되는  아닌가? 그럼, 화면의 -하단이 별개의 그림인가? 아니, 가운데에 있는 하얀 잿빛의 건물은 상하단 화면에 걸쳐 이어지고 있지 않나?


     제목을 다시 보았다. <정물의 꿈>. 현실을 온전하게 원근법적으로 재현한 것이 아니다. 상단의 풍경과 하단의 정물이 별개의 그림이다. 결국 ‘별개의 두 화면(캔바스)를 위아래로 이어 세운 것처럼’ 그린 것이라고 결론을 지었다. 즉, 평면에 놓인 두 개의 화면이 3차원의 원근법적 깊이감을 드러내는 착시를 일으키도록 트릭을 건 것이다. 그 착시의 주범은 상하단의 화면 을 이어붙이고 있는 잿빛 건물이었다.

     하기야 원근법이란 것도 3차원을 2차원의 평면에 재현하기 위한 ‘사물을 보는 방법의 하나’일 뿐이라고 한다니, ‘시’(視)를 교란시키는 이런 트릭 정도는 가벼운 일탈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초록의 화려한 원경에서 문득 심상찮은 기운이 몰려온다. 오로라가 불안하게 넘실대는 것 같기도 하고, 낙뢰(落雷)가 한꺼번에 쏟아지는 것 같기도 하다. 마구 헝클어진 나무가 불안감을 증폭하고, 장대한 플라타너스조차 강풍에 버거워한다. 가운데 선 건물은 이미 잿빛으로 다 불타버렸나 보다.

     건물 아래쪽에 검은 형체의 사람이 헤엄을 쳐 앞으로 달려오고 있다. 무척 긴박하다. 불탄 건물에서 탈출한 사람일까? 건너편 들에서 쏴아 하고 몰려오는 소낙비처럼, 무섭게 들이닥치는 재난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려 저렇게 사생결단으로 숨 가쁘게 헤엄쳐 건너오고 있는지도 ……     


     성난 파도에 난파한 조각배처럼, 온통 하늘의 불길한 소용돌이에 빠져버린 열기구가 위태롭게 떠간다. 고요하던 정물들조차 어수선해 보인다. 마치 지진 직전의 미세한 떨림이 있는 것처럼.

     

#화가 #형 #류장복 #그림대화

정물의 꿈_oil on linen_121.2 x 90.9cm_2012-17/ Jangbok Ry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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