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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창복 Apr 03. 2023

철암랩소디_봄눈 내리는 밤

[그림대화] (22)

     철암이다. 철암은 오래 전, 작가-형을 따라 가본 적이 있다. 10년도 더 된 것 같다. 공업화시대의 상징적인 곳이다. 한 때 번영을 구가했으나 가차 없는 시대 흐름에 밀려 한순간에 쓸려 가버린, ‘상실’의 아픔이 깊이 패이듯 새겨진 고장이었다.


     읍네 밤거리인 모양이다. 유난히 밝게 빛나는 가로등 불빛이 투명한 오렌지 빛으로 반사되더니, 소담스럽게 내리는 눈과 잘 어우러진다. 참 상큼한 밤이다. 번영기 철암 영광의 잔영(殘影)일지도 …….      


     점백이 강아지 한 마리가 여유롭게 찻길을 건너는 것을 보니 달리는 차들은 이미 잦아든 시간인가 보다. 열린 봉고차 뒷문으로 잔뜩 실린 물건이 보인다. 아마도 이 시간에 납품하느라 차를 대고 물건을 옮기는 모양이다. 그 옆 인도를 바삐 뛰어가는 사람은 무슨 일일까 ……, 아직도 심심찮게 갱도에 사고가 나는 곳이라던, 동네 사람의 이야기가 기억났다.


     등을 젖히고 느긋하게 걸어가는 중년 아저씨, 비척대는 모양새가 기분 좋게 한 잔 걸쳤나보다. 2층 옥상에서 두 사람이 다투는 모습이 보인다. 한 시대의 영광과 번영이 쓸려나가는데 순순했을 리 없다. 많은 이들에게 절망을 떠안기고 깊은 상처들을 냈을 것이다. 옥상 난간에 선 두 사람처럼 모두들 그렇게 위태롭게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앗! 오른쪽 나무에 꽃이 피어있다. 눈이 오는데 꽃이라니? 그렇다. 철암에는 봄눈이 온다고 했다. 스러져가는 겨울을 아쉬워하는지, 오는 봄을 시샘하는지, 이른 봄에 눈이 내린다고 했다. 하지만 한겨울마냥 매서울 리 없다.


     꽃나무 아래에서도 ‘꽃’이 피고 있다. 두 남녀가 서로를 꼭 껴안고 떨어지질 못한다. 옆 건물 2층에서도 내려다본다. 누군지 궁금해 했을까? 이른 봄 눈발 속에서도 잘 피어난 꽃처럼, 예사롭지 않은 인연 잘 보듬어가길 기대했으리라.    


     길 건너편, 차가 한 대 서있다. 윈도 브러쉬가 차창의 눈을 쓸어낸 자국 너머로 형체가 어른거린다. 가로등 아래에 짙게 고인 어둠을 탐닉하느라 잘못 건드린 모양이다. 봄눈이 내리는 밤, 살짝 찬 밤공기에 서로의 온기가 그리웠을 거다.   


     가로로 길게 펼쳐진 파노라마의 화면이 시원하다. 마치 내가 그 거리에 서서 바라보고 있는 듯 생생하다. 철암에 다시 가보고 싶다.      


#화가 #형 #류장복 #그림대화

철암랩소디-봄눈 내리는 밤, oil on linen, 90.9x363.5cm, 2018-21/ Jangbok Ry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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