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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창복 Jun 22. 2023

제발 멈추세요

[그림대화] 80

1.


     주변의 기와지붕들이 가깝게 내려다보이는 슬라브 옥상, ‘재난의 잔해’들 속에 섬뜩한 해골들이 어지럽게 널브러져있다. 첼리스트가 활 없이 손가락으로 현을 튕긴다. 사선으로 기울인 악기와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채 연주에 몰입해있다.


     어둠에 잠긴 허공에서 스며나온 듯, 시커먼 열차가 커다란 소리와 함께 허연 연기를 내뿜으며 첼리스트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 굴뚝에 앉아 돌아보는 부엉이, 첼리스트를 향해 날아오며 착륙지점을 살피는 부엉이, 주변을 겉도는 점백이 강아지.


     첼리스트를 감싸고 도는 한 무리의 하얀 나비들, 마치 현을 튕겨 공명된 악기 속에서 퍼져나오는 것만 같다. 어쩌면 첼리스트의 연주를 부활의 신호로 접수한 생명의 징후들이 해골 속에서 뛰쳐나오고 있는 지도.      


2.


     그런데, 화면 우하단에, 블라인드를 통과한 빛줄기 같은 줄무늬는 뭘까? 옥상바닥에 드리운 빛을 그린 것인가 했는데, 그림을 그리고 있는 작가의 캔버스에 비친 빛줄기란다.


     그 순간, 대상이 재현되는 평면(매체)에 불과한 캔버스 화면이 또 다른 ‘대상’으로 전환한다. 실외 ‘옥상’과 작업하는 ‘실내’라는 이원적 공간이 설정된다.


     옥상에는 첼리스트라는 실존의 인물과 기억으로부터 소환된 열차가 있다. 나비 역시 작가가 불러낸 가상의 대상일 터. 실내에는 캔버스에 비친 그 빛줄기를 통해, 그 순간 그림을 그리고 있는 작가의 ‘존재’가, 작가가 그림을 그리고 있는 ‘행위’가 환기된다.


     현재 시점의 존재와 과거 기억 속 존재가 공존하면서 동시에, 실외의 풍경과 실내 캔버스 평면이 중첩된다. 시간과 공간의 질서가 엉킨다. 1)대상(화면 속 실재와 기억들)과 2)재현된 가상(빛줄기가 내려앉은 캔버스 화면), 3)작가의 존재(그림을 그리고 있는 행위)가 동시에 드러난다. 그런데, 왜일까? 이런 ‘복잡한’ 화면구성의 전략은 무엇을 위함일까?     


3.


     열차가 상징하는 질주하는 근대의 폭력성, 옥상 바닥에 널린 해골이 전하는 디스토피아적 현실, 허공에서 피어오른 희망의 하얀 나비들 …… 이런 것들이 그려진 캔버스 화면에 ‘난데없이’ 드리워진 빛줄기는, “이거 지금 그림이야!” 라고 외친다. 마치 “이거 지금 연극인 거 알지요?”라고 외쳤던 브레히트처럼 말이다.


     ‘소격효과’(疏隔效果, alienation effect)는 감상자로 하여금 몰입을 차단하여 극적 환영에 빠지지 않도록 한다. 그림의 메시지를 쫓아 그림 속 이미지를 살피는 감상자에게 작가는 갑자기 ‘지금, 이곳’을 깨우듯 환기한다. ‘지금 이곳’의 현재성을 환기하는 것은 감상자로 하여금  작품에 대해 ‘비판적으로’ 깨어있을 것을 요구하기 위함이다.


     비판적으로 깨어있다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재현된 ‘가상’(그림)에 매몰되지 말고 감상자가 발 딛고 ‘살고 있는’ 현실로 돌아와, 가상이 던지는 메시지를 주체적으로 나아가 실천적으로 ‘인식’하라는 주문은 아닐까?     


#화가 #형 #류장복 #그림대화 #첼리스트 #재난 #해골 #징후 #소격효과

제발 멈추세요, oil on linen, 116.8x91cm, 2018-21/ Jangbok Ry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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