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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창복 Feb 03. 2022

빵 기계와 탱(TANG) 가루

추억의 주전부리 (4)

   하루는 학교 파하고 집에 왔는데 엄마가 부산하다. 박카스 상자만 한 물건을 들고 요리조리 뜯어보고 매만지며 신통해 한다. 그러더니 그 안에 들어있던 종이를 꺼내더니 앞뒤로 뒤집어가며 들여다보는데 잘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한다. 드디어 빵기계를 들인 거다. 그 무렵 동네에 빵기계 바람이 불었다. 얼리 어답터 아줌마의 사용 후기와 평판이 동네의 화젯거리로 돌고 있었다.

   “아 글쎄 반죽만 넣고 전기 꼽고 일하고 있으면 지가 알아서 빵이 되더라구.”

   “애들도 앉은 자리에서 빵 한 통을 후딱 다 해치워버린다니까.”

   먹고 돌아서서 먹을 거 찾는 10대 초반의 먹성 좋은 애들에게 끼니 사이라 애매할 때 먹일 주전부리로는 이만한 것이 없다는 결론이 진즉에 났다. 그래도 마지막 결심을 굳히기 위해서라도 시식해본다. 갓 쪄낸 데다가 보슬보슬 부드러운 빵 맛이 엄마 입맛에도 그럴듯했다. 엄마는 더 이상 망설임은 없다는 듯, 결정한 모양이다.

   “우리도 합니다. 갖다주소.”     


   밀가루, 날계란, 설탕, 베이킹파우더 등을 설명서에 적힌 대로 계량컵에 맞춰 넣는다. 반죽이 제대로 되었다 싶으면 빵기계 통에 그대로 들이붓는다. 빵기계 안쪽 벽면에 여러 개 그어진 금 중에서 유독 길게 나온 놈까지만 차게 하면 되는데, 통 높이의 7부까지만 넘기지 않으면 된다고 했단다. 그리고 뚜껑 닫고 전기 꼽고 대략 30분 정도만 기다리면 완성된다고 했다. 작은형과 나는 내내 자리를 뜨지 못하고, 빵기계를 바라보며 지키고 앉았다. 마침내 기계가 뜨거워지는가 싶더니만 이내 하얀 김을 한참 내뿜는다.

   “엄마, 이제 다 된 거 같애~”

   “네네, 안녕히 가세요.”

   엄마는 손님 배웅 건성으로 해치우고 방으로 달려들어 온다. 어디 보자, 전기를 뽑고 뚜껑을 여는데, 빵기계가 넘치도록 한껏 부풀어 오른 빵의 살갗이 모락모락 김 속에서도 촉촉한 윤기로 반질거린다. 엄마는 보채는 형제를 제지하고 부엌칼을 가져오라 하더니, 먼저 한 점 잘라내 맛을 본다. 우리 형제는 침만 꼴까닥한다. 첫 작품치고는 괜찮다는 평가가 엄마 입가에 번진다. 먹성 좋은 두 형제는 사자 엄마가 사냥해놓은 먹잇감에 달려들 듯 덤벼들어 순식간에 한 통을 다 먹어 치웠다. 그래도 이 빵이 양이 적은 건 아니었다. 슬라이스로 썰기 전 식빵 덩어리 정도는 되었다. 그날 저녁밥은 둘 다 시큰둥했다.

   물론 빵기계 빵보다 더 맛난 빵이 슈퍼가게에 가면 많이 있다. 돈이 귀한 시절, 먹고 살기 버거운 형편에 먹성 좋은 애들의 식탐을 사 먹이는 방법으로 잠재울 수는 없는 일이라, 빵기계는 그야말로 획기적인 혁신제품이었다. 빵기계가 이른바 가전제품의 효시였다고 하면 좀 과할까? 아마도 집집마다 장만하는 가전품목으로는 빵기계가 원조 격에 드는 것은 사실이었을 거다. 그 후로 전기밥솥이 나오고, 전기다리미, 전기냉장고, 세탁기, 김치냉장고 …… 등등이 이어지며, 가전제품의 시대는 열리고 있었다. 동시에 산업화시대 역시 활짝 열리고 있었음을 확인하는 대목이다. 산업화시대는 가전제품 시대와 동반하니까.     


   그 시절 음료수는 수돗물이나 숭늉, 끓인 보리차 식힌 물이 전부였다. 음료수라 부르기도 그렇고, 그냥 물이 다였다. 박카스가 있기는 했지만, 어른들이 피로회복용 약으로 먹는 정도로 알았다. 그러던 시절에 최고의 인기 음료수는 사이다였다. 칠성(七星)사이다, 파란 병에 별 일곱 개가 그려져 있는데, 작은 별 여섯 개가 큰 별 하나를 에워싸고 있었다. 달콤하면서도 톡 쏘는 탄산의 위력을 처음 경험하고서는 잊을 수가 없었다. 콧속을 후벼 찌르듯 찌르르 쎄한 통증으로, 사이다의 존재감은 어린 시절부터 몸에 진하게 각인되었다.

   게다가 사이다가 소화제 노릇까지 한다는 사실은 그렇게 위안이 될 수가 없었다. 단순한 군것질을 넘어 소화를 돕는 ‘약’이라니, 나라를 구할 정도는 아니라도 사이다를 사 내라는 요구를 떳떳하게 할 수 있게 하는 그럴듯한 명분 하나가 공짜로 생겼다고나 할까? 사이다는 소풍의 필수 아이템이었다. 더운 날씨에 왕릉을 돈다고 오전 내내 가방 속에서 데워졌다가 나오느라 냉기 하나 없이 뜨듯해도, 사이다는 배신하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소화제의 명분을 들이댄다 한들, 소풍을 간다거나 집에 귀한 손님이 오시거나가 아니면 손쉽게 사 먹을 수 있는 음료수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온 대체재가 집에서 만들어 먹는 음료수다. 음료 시장에 혜성같이 나타나 음료 회사를 긴장시켰을 물건은 바로 ‘탱’이었다. 영어로 TANG이라고 쓰여 있었다. 탱은 주스가루였다. 물에 두어 스푼을 타서 젓가락을 담가 휘휘 저어 녹이면, 바로 마셔도 되는 음료수가 즉석에서 만들어지는 거였다. 그야말로 신통방통이었다. 

   조금 신맛이 강해서 설탕을 넣어 다시 저어준다. 그럼 바로 ‘오란 씨’가 된다. 당시 사이다 다음으로 오란C라는 음료수가 나왔는데, 요게 오렌지 맛이 나는 데다 신맛이 살짝 들어가 있어서 사이다를 졸지에 촌스럽게 만들어버렸다. 그 후론 국민학생들도 소풍 때 가방에 사이다 대신 오란C를 넣어갔다. 아마도 선전에 나와서, 하늘에서 별을 따다 하늘에서 달을 따다 두 손에 담아드리겠다는 예쁜 누나 탓도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미아리의추억 #주전부리 #빵기계 #탱가루 #사이다 #오란씨 

#미아리의추억 #주전부리 #빵기계 #탱가루 #사이다 #오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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