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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창복 Feb 04. 2022

쥬단학과 아모레

   방물 아저씨와 신앙촌 아줌마의 동네 출현이 뜸해지는가 싶을 때 또 다른 아줌마들이 동네에 나타났다. 이 아줌마들은 지게나 보따리 대신 가방을 들고 다녔는데, 그사이 발전한 동네 풍경에 어울리는 훨씬 세련된 모습이었다. 이 가방은 직육면체 모양으로 께끼통 처럼 각이 져 있었다. 아줌마는 이 가방을 보통 두 개 들고 다녔는데 좀 큰 놈은 손잡이를 잡아서 들었고, 작은놈은 책가방처럼 한 팔에 끼고 다녔다. 가방 안에는 화장품이 잔뜩 들었다. 엄마는 쥬단학 아줌마, 아모레 아줌마로 불렀다.

   쥬단학과 아모레는 당시 화장품을 만들어 파는 경쟁사 관계였다. 입고 다니는 복장과 가방의 색과 디자인이 달라서 멀리서 봐도 구별이 됐다. 양 사가 취급하는 제품은 대체로 비슷했을 거라고 보면, 제품 외적인 경쟁도 매우 치열했으리라 추측된다. 대충 기억나는 화장품이 손톱 칠하는 매니큐어, 입술 그리는 루즈, 눈 화장하는 마스카라, 그리고 가장 많이 사용하는 분(粉), 로션 등등이었다.

   그중에 엄마가 화장하고 나들이하고 오면, 자기 전에 검지와 장지 두 손가락으로 듬뿍 떠내 얼굴 전체에 바르고 문지르는 구리무가 있었는데 콜드크림이라고 했다. 무슨 화장품을 저렇게 많이 처바르나 의아해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화장품들은 얼굴에 다 묻힐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아주 조금만 손에 묻히듯 떠서 바르곤 했는데, 유독 콜드크림만큼은 큰 통에서 헤프다 싶을 정도로 푹 떠 발랐다.

   나에게도 해당되는 화장품이라면, 겨울에 세수하고 나서 얼굴이 땡길 때 바르면 맨들맨들 해지는 밀크로션 정도였다. 또 장난감 같은 작은 화장품들이 있었다. ‘샘플’ 화장품이라고 크기는 작은데 모양은 그대로 다 갖추고 있으니 애들 소꼽장 마냥 앙증맞고 귀여워서 그냥 가지고 싶었다. 화장품을 사면 화장품 아줌마는 꼭 샘플을 몇 개씩 집어주었다. 덤인 셈인데 어떨 때는 덤이 더 많은 거 아닌가 싶기도 했다. 엄마는 화장품을 사는 거보다, 덤으로 주는 샘플에 더 집착하는 것 같았다. 아줌마가 한 움큼을 집어줘도 기어코 더 달라고 우겨서 한 움큼을 더 받아냈다. 난 엄마가 좀 심하다 싶었고, 아모레 아줌마는 저러다 밑지는 것 아닌가 걱정되기도 했다. 내가 세수하고 바르는 로션은 모두 샘플로 받은 것들이었다. 병 크기가 워낙 작으니 들어있는 화장품도 찔끔이라, 좀 쓰다 보면 잘 안 나온다. 손바닥에 대고 한참을 탁탁 쳐야 눈곱만큼 조금 나온다. 그래서 항상 거꾸로 뒤집어 세워놔야 하는데, 크기가 워낙 작아서 잘 서 있지도 못했다.     


   화장품 아줌마는 집집마다 찾아오기도 하지만, 동네 아줌마들이 모인 곳이면 항상 나타난다. 언젠가 엄마 따라서 계모임에 쫓아간 적이 있었는데 아줌마들이 모여서 짜장면 시켜 먹는다는 소문을 듣고 엄마를 졸라 따라나선 것이었다. 그런데 모임 장소에는 쥬단학이었는지 아모레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화장품 아줌마들이 일찌감치 와 있었다.

   엄마들의 계모임은 일종의 마을금융인데, 매달 일정한 금액을 모아서 한 사람에게 몰아주었다. 몰아주는 순서는 계주를 1번으로 배려하고 주고 나머지는 각자의 형편을 맞춰 정한다. 대신 앞순위는 목돈을 일찍 타는 만큼, 원금에 이자를 덧붙인 원리금을 매달 곗돈으로 내고, 반대로 뒷순위일수록 내는 곗돈이 원금보다 작게 책정된다. 더 내는 이자가 덜 내는 돈을 충당하니 매달 일정한 곗돈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오야’라 불렸던 계주(契主)가 조율하고 정해서 운영까지 책임진다. 그래서 계주는 아무나 맡지 못하고, 혹시 사고가 나더라도 수습할 거란 믿음을 줄 정도의 재력이 있고, 이런저런 이견을 조율할 리더십이 있는 사람이 맡았다. 우리 동네에서는 김 중령 집 아줌마인 영찬 형네 엄마가 계주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동네 계모임이 싹 사라졌다. 신문에 계주가 야반도주하는 사건이 심심찮게 올라오고, 계모임과 관련한 사건 사고가 별안간 잦아지더니, 아예 사회문제로 취급되다가 사회악으로 지탄받으며 급격하게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물론 고약한 계주의 야반도주 같은 일이 간혹 있기야 했겠지만, 그 당시에 그렇게 잦아진 데는 박정희 정부의 정책 탓이 크다. 산업화를 주도하던 정부가 시중의 자금을 모조리 끌어모으려고 민간의 사금융을 없애려 한 것이다. 이렇게 되자 동네 이웃 간의 신뢰에 기초해서 돌아가던 돈줄이 일시에 끊기면서, 지역에서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꾸려가던 지역경제의 토대도 타격을 받게 되었다. 참으로 아쉬운 대목이다. 물론 그 이후 마을금고나 신협이 등장하긴 했으나, 대부분 중앙금융권의 2부 리그로 머무는 형편이다.       정해진 순번이 돌아와 곗돈을 타는 사람이 목돈이 생긴 턱으로 그날 점심을 쏜다. 대부분 계주의 집에 모이거나 여의찮으면 중국집에 모여서 곗돈 계산을 마치고 짜장면을 시켜 먹었다. 반주도 한두 잔 하고, 바쁜 사람 가고 나면 꼭 화투를 쳤는데 기껏해야 민화투였다. 놀음이라고 하기는 소소한 판돈이라 동네 아줌마들의 우의와 연대를 다지고 확인하는 놀이라고 보면 됐다. 화장품 아줌마의 무대는 짜장면을 먹고 화투판으로 넘어가기 직전 대목에서 벌어진다.

   동네 아줌마들이 다 모여 있는 자리이니 이보다 영업상 요긴한 자리가 있을 수 없었다. 일단 주요 안건인 곗돈 정산도 마치고 밥을 먹고 나 다들 마음이 넉넉해질 무렵, 화장품 아줌마는 비장의 신제품을 꺼내 들고 일장 설명회를 한다. 때에 따라서는 모델을 동반해서 시연하기도 한다. 여기서 간혹 한두 명의 아줌마가 사기도 하는데 대부분은 그 자리에서 바로 사지 않는다. 설명 중간마다 맞장구치면서 보이던 관심이나 시연 때 보여주었던 공감의 열기에 비해, 현장의 판매실적은 낮다. 그래도 화장품 아줌마는 절대 조바심을 내거나 실망하지 않는다. 먼저 사서 써본 사람의 평판이 어느 정도 돌고 나서야 엄마들이 산다는 것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방물장수의 오만가지 물건에서 신앙촌 아줌마의 생활소품으로, 다시 쥬단학-아모레 아줌마의 화장품으로, 방문판매의 품목이 현저하게 압축되고 있었다. 방물 아저씨 개인의 장사에서 신앙촌이라는 종교단체로 다시 화장품 회사라는 기업으로, 방문판매의 주체도 변천해왔다. 외관은 세련되고 관리는 체계적으로 조직화하여온 방문판매의 역사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보면 쥬단학-아모레 뒤를 잇는 방문판매 주자로는 야쿠르트 아줌마가 꽤 오래 자리를 지켜오고 있는 셈이다.

   방문판매는 특정한 고객을 ‘마주하는’ 친밀한 관계를 토대로 한다. 친밀한 관계를 쌓기 위해 직접 대면하고, 대면을 위해 집으로 직접 방문했다.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우선은 생활의 필요와 이 필요를 충족할 제품이 일단 있어야 하니 필요 조건이다. 더불어 이 필요 조건에 더해서 일상의 교감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바로 충분조건이다. 일상의 교감을 촉발하고 유지, 발전시키는 충분조건을 동네에 관한 크고 작은 정보가 채우는 셈이다.

   누구나 다 아는 뻔한 정보에서부터 누구누구네 집의 내밀한 대소사 정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정보가 방문판매를 통해서 옮겨 다닌다. 갈수록 일상이 바빠지는 사람들과 더욱더 많은 동네 정보를 구축하는 판매자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정보 비대칭이 오히려 관계의 매개가 되고 거래를 유지하는 바탕이 되고 있었다.


   (PS. 참 ‘찬 손 부르튼 손’이라는 배우가 있었는데, 그가 화장품 선전에도 나왔다. 물론 남성 화장품이었다. 그의 머리는 항상 덥수룩하게 덮여있고, 콧수염은 귀밑에까지 도달할 것처럼 길게 나 있었다. 이 배우는 근육질의 남성미가 철철 넘치는 배우로 유명하다. 서부 영화에서 악당들을 순식간에 다 쓰러뜨리고 총부리를 입으로 가져가 후~ 불고 나서, 말없이 말 타고 유유히 떠나는 그런 배우였다. 본명은 찰스 부론슨이다. 부론슨은 눈꼬리가 약간 처진 상이라 사람이 순해 보이고, 특히 요란하지 않게 쓰윽 웃으면 진짜 사람 좋아 보였다. 이 배우가 선전한 화장품은 아마도 면도하고 바르는 스킨로션쯤 되었을 거다. 나도 당시에는 사타구니 언저리와 코밑에서만큼은 급격하게 남성이 되어가는 중이었으니 관심이 갔던 것 같다.)


#미아리의추억 #곗돈 #화장품 #쥬단학 #아모레 #방문판매

류해윤_어미닭과 병아리_종이 위에 아크릴릭_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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