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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창복 Sep 06. 2022

낯선 다리 하나

   우리 식구는 다섯인데 방은 가겟방 하나가 전부라, 형들이 크면서부터 방이 따로 필요했다. 아마도 큰형이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세탁소 근처에 방을 얻어 큰형 작은형이 따로 살았다. 물론 잠만 따로 자고 밥은 세탁소 가겟방에서 함께 먹었다. 그러다가 나도 중학생이 되면서 가겟방에서 잘 수가 없었는데, 다행히 형들과 나이 터울이 많이 져서, 형들이 차례로 군대에 가는 바람에 방 하나로 버틸 수 있었다.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작은형은 고등학생이고 큰형이 군대에 입대했다. 큰형이 제대하면 난 고등학생이 되었고, 또 작은형이 입대했다. 작은형마저 제대했을 땐, 난 이미 대학생이었고 거의 집에 붙어있지 않았다.

   삼 형제가 전전한 방도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지금 기억에 남는 곳만 떠올려 봐도, 세탁소 아래 비탈 희숙이네 집, 세탁소 바로 아래 가겟방, 학교 앞 신신 문방구 한옥 대문의 안집, 세탁소 앞 형기 형네 슈퍼 2층 방, 세탁소 바로 아래 골목집 …… 순서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모두 세탁소에서 5분 이내 거리에 있다는 점은 공통이다. 엄마가 수시로 들여다봐야 하니 방을 얻을 때 가장 중요한 기준이었을 거다.     


   이 방 중에 내가 잊을 수 없는 방이 있었는데, 신신 문방구 안집, 한옥 집 방이다. 내가 막 중학생이 되었을 때였다. 큰형은 군대 갔고 대학생인 작은형과 지내던 방이다. 중학생이 되면서부터는 학교 마치면 집에 와서 옷만 갈아입고 큰길에 있는 독서실에서 공부했다. 토요일이었다. 오전수업 마치고 집에 일찍 와서, 엄마가 차려준 점심 먹고 책을 잔뜩 싸서 독서실로 바로 올라갔다. 다음 주부터 시험 기간이라 늦게까지 주말 내내 독서실에 살 작정이었다. 그리고 그날은 어찌어찌하다가 두어 시를 넘겨버렸다.

   졸음도 쏟아지고 바람도 쐴 겸 해서 독서실 옥상에 올라갔더니, 아니나 다를까 동네 형들이 몸을 낮춰 숨긴 채 옆 건물 훔쳐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독서실 옆 건물은 여관이었다. 나는 차마 들여다볼 용기는 없었다. 사실 독서실 주인아저씨는 아버지 친목계원이다. 아줌마도 내가 가면 공부하러 왔냐며 잘 챙겨주신다. 자리도 입구에서 좀 떨어진 자리로 골라주곤 했다. 아줌마가 가끔 감시하러 옥상에 올라오는데, 만약 나도 옥상에서 ‘그러고’ 있는 것을 들키기라도 한다면, 엄마 아버지 볼 면목이 없다. 나는 아예 엄두 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여관 쪽 난간에서 멀찍이 떨어져 앉아서, 형들이 중계하는 장면을 상상으로만 재현하며 형들이랑 시시덕대곤 했다. 그럭저럭 새벽이 되고, 독서실로 다시 내려와서 잠시 엎드려 졸다 보니 아침이 되었다. 책보를 주섬주섬 챙겨서 방으로 향했다.

   마침 한옥 대문이 빼꼼히 열려있었다. 조용히 문을 밀고 들어갔다. 마당 가운데 조그만 화단을 돌아 방 앞에 서서 디딤돌에 올라서려는데, 엇? 작은형 구두 말고 다른 신이 놓여있다. 작은형은 구두를 잘 꺾어 신기 때문에 딱 봐도 표가 난다. 그런데 그 옆에 나란히 놓인 구두가 낯설다. 여자 구두였다. 순간 가슴이 쿵쾅대고 별의별 시나리오를 다 떠올려보지만, 처음 떠올린 시나리오로 귀착되고 만다. 시나리오에 대한 결론이 확고해지자, 그 ‘현장’에 대한 궁금증은 폭발적으로 커져만 갔다. 가슴이 쿵쾅거리는데 이러다가 정말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그 현장을 보고 나서 감당할 자신은 또 없었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후 어떠한 낭패들이 닥쳐올지 실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폭풍처럼 몰려왔다. 하지만 내 몸은 이미 방문으로 한발 다가가고 있었다. 방안의 인기척을 살피려 귀를 대봐도 조용했다. 조심스럽게 사르르 문을 살짝 열었다. 예상대로 이불 사이로 비어져 나온 다리는 두 개가 아니고, 셋이었다. 둘은 작은형 것이 확실한데, 작은형 발에 살짝 걸쳐있는 나머지 하나는 발목이 가늘고 게다가 엄지발톱에 빨간색이 칠해져 있었다.

   숨죽이느라 눌러놓은 심장이 다시 벌떡거렸다. 그런데 그 순간, 이러고 있는 나를 누군가가 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문을 다시 확 닫았다. 하지만 손은 아까 열 때와 마찬가지로 천천히 닫고 있었다. 다 닫힌 문을 확인하고 얼른 자리를 뜨려는데, 안에서 미세한 인기척이 들린다. 순간 난 얼음땡이 되어 얼어붙었다. 분위기를 살피는지 안이 조용했다. 그리고는 별 조짐이 없었다. 발뒤꿈치를 들고 빠른 걸음으로 대문으로 돌아왔다. 혹시 한옥 대문이 눈치 없이 쩌~억 거릴까봐, 몸이 겨우 빠질 정도만큼만 대문을 밀쳤다.

   막상 골목으로 나오니 벌렁거리던 심장도 차분해지고, 의외로 나도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마치 다 큰 것처럼. 하지만 세탁소도 안 들리고, 곧장 독서실로 되돌아갔다.


#미아리의추억 #작은형 #독서실 #낯선다리

류해윤_연인_종이 위에 아크릴릭_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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