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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창복 Sep 04. 2022

한겨울 눈의 전쟁

   겨울엔 특히 눈이 내리거나 눈 온 뒤에는 비탈길 눈썰매가 인기다. 그날은 눈이 와도 참 많이 왔다. 아침부터 깜깜해질 때까지 종일 쉬지 않고 펑펑 쏟아졌다. 우리 세탁소는 비탈길이 시작되는 네거리 모퉁이에 자리 잡고 있어서, 눈이 오면 언제나 세탁소가 미끄럼 놀이의 출발선이 된다. 대나무 우산대를 반으로 쪼개고 튀어나온 마디를 칼로 잘 다듬어, 앞에서 3~4cm 정도 되는 지점을 연탄불에 대고 구부리면 근사한 ‘대나무 스키’가 된다. 대나무 스키 두 쪽을 출발선에 적당한 간격으로 가지런히 벌려서 정렬한 후, 그 위에 두 발을 조심스레 잘 맞춰 올려놓고 쪼그려 앉으면, 앉자마자 쏜살같이 미끄러져 어느덧 저 아래 평지에 다다른다. 

   중간에 발 하나가 삐끗해서 대나무 스키에서 탈선하면, 중심을 잘 잡고 공기저항을 이기려 잔뜩 오므린 몸뚱이는 여지없이 옆으로 튕겨지며 고꾸라진다. 그럼 바로 벌떡 일어난다. 오르막을 올라 출발선 고지에 서서 스키를 정렬하고, 오므린 몸을 다시 곧바로 내리꽂는다.  대나무 스키도 좋지만, 진짜 선수들은 비닐종이로 탔다. 일단 간편하고 스타트도 쉽고 무엇보다 속도가 빠르다. 일단 탄력을 받으면 쏜살이다. 비닐 중에서도 최고로 치는 비닐이 비료포대 비닐이다. 크기도 넓적한데다가 비닐이 두꺼워 무척 튼튼하다. 오래 타도 잘 해지지 않았다.

   자동기계처럼 무한반복이라도 할 것 같은 기세와 열기에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은 아이들 얼굴에 닿자마자 사라졌다. 내버려 두었으면 깜깜한 밤중까지 이러고 놀았을 테지만, 드르륵 창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머리 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창복아, 창복아, 창보옥...” 

   못 들었다고 버티기에는 소리가 너무 커진 큰형의 부름에, 후다닥 세탁소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간다. 쳐들어오는 기세에 움찔한 엄마가 다림질을 멈추고 살살 다녀라 했지만, ‘갈 길이 바빠요’ 눈으로 흘깃 대답하고는 눈도 안 털고 가겟방 툇마루를 넘어 방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는 익숙한 듯, 누워있는 아버지의 발치로 바로 가서 자리를 잡는다. 그제야 자잘한 눈얼음 알갱이들이 붙어있는 털장갑을 벗고, 이불 속에 두 손을 넣는다. 아버지는 개복수술 마치고 낫는가 싶더니 몇 개월 만에 재발하여 아예 자리를 지고 누웠다. 하루 종일 다리가 저려 힘들어해서  삼형제가 돌아가며 아버지 다리를 주물렀다. 

   “으이고 시원타.” 

   아버지의 신음 같은 격려에 두 손은 이불 속에서 바쁘게 놀리고 있지만, 온 신경은 방 창문을 향한다. 창문을 타고 들려오는 아이들 소리만 들어도 누가 타는지, 누가 넘어졌는지 다 보인다. 단칸방인 가겟방, 성에가 화려하게 껴있는 창문을 열면 미끄럼 비탈이 바로 내려다보였다.        


   좀 커서는 스케이트장에도 갔다. 창동 논바닥에 물을 부어 만든 스케이트장인데  겨울방학이 시작되면 개장했다. 전 세계의 국기가 인쇄된 책받침만한 종이 국기들이 줄줄이 엮여있는 만국기가 스케이트장 얼음판 위를 우산살처럼 덮고 있었다. 그 모습만으로 신나는 광경이었다. 

   스케이트가 없어도 1시간 단위로 돈을 내고 스케이트를 빌려 탈 수 있었다. 당시 부잣집 애들은 ‘전승현’ 스케이트를 탔다. 처음엔 잘 몰랐는데 전승현이 사람 이름이라고 했다. 남자애들은 날이 신발보다 긴 롱 스케이트라는 걸 탔고, 여자애들은 날 앞에 톱니가 있는 피겨 스케이트를 신고 탔다. 스케이트장 얼음판 둘레에는 가마니를 죽 깔아놔서, 달리다가 지치면 가마니로 달려가 엎어져서 그 자리에 앉아서 쉬었다. 

   스케이트장에 들어가는 입구에는 스케이트 날을 갈아주는 아저씨들이 나란히 앉아있었다. 스케이트 신발을 거꾸로 세워 고정시키는 틀이 있는데, 그 틀에 스케이트 두 짝을 나란히 묶어두고, 길고 납작한 모양의 쇠줄을 쓱쓱 밀면서 날을 세워주었다. 날 가는 아저씨 옆에는 군것질 거리를 판다. 뜨끈한 오뎅과 매운 떡볶이, 그리고 하나만 먹어도 출출한 시장기를 단박에 없애주는 핫도그가 인기였다. 핫도그는 기다란 소시지를 나무젓가락에 꼽고 밀가루 옷을 듬뿍 입혀 튀긴 다음, 식으면 밀가루 옷을 한 번 더 입혀 튀긴다. 그래서 두툼하고 하나만 먹어도 든든했다.

   역시 재민이는 아버지가 생일 선물로 사주었다면서 스케이트 두 짝을 목도리처럼 목에 걸고 나타났다. 바로 그 유명한 전승현 스케이트라고 자랑을 했다. 재민이는 스케이트장에서 돈 받고 가르쳐주는 선생님에게 벌써부터 타는 법을 며칠째 배우고 있었다. 스케이트를 처음 타는 사람도 몇 시간 엉거주춤 버티다 보면 얼음판에 혼자 설 수 있게 되고, 어기적대면서 그런대로 앞으로는 나갈 수는 있다. 그다음 단계로 가려면 코너를 돌 줄 알아야 하는데, 재민이는 아주 능숙했다. 

   앞으로 죽 달리다가 곡선 주로가 시작되면 오른발을 슬쩍 들어 왼쪽으로 옮기다가 바로 왼발을 넘겨서 얼음판에 내려 놔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뒤에 처진 왼발을 얼음판을 꾹 누르며 뒤로 쭉 밀어낸다. 그리고 잽싸게 왼발을 다시 당겨서 빼낸 다음 왼쪽 제자리에 옮겨 중심을 잡아야 한다. 그런데 이게 말처럼 쉽지 않다. 그러니까 일단 몸을 비스듬히 기울인 채 한 발로 지탱할 수 있어야 한다. 대부분 오른발을 들면서 넘어지고, 왼발로 넘어가면서 날이 발에 걸려 넘어진다. 남들은 제대로 서있기도 어려운데 재민이는 몸을 잔뜩 수그린 채 뒷짐까지 지고, 발을 살짝살짝 옮기면서 코너를 스무스하게 도는데, 진짜 멋있었다.

   좀 놀다 보면 어느새 기차놀이처럼 뒤꽁무니를 잡는 줄이 생겨난다. 서로 모르는 사이라도 너도나도 꽁무니를 잡는다. 어느새 2~30명이 연결된 줄이 만들어진다. 그럼 또 다른 쪽에서도 줄이 만들어지고, 두 줄이 연싸움 하듯이 중간을 끊어내는 게임으로 이어진다. 줄이 끊겨 떨어져 나간 덩어리는 꽁무니를 다시 잡아 이으려고 열심히 쫓아간다. 이 놀이는 코너를 돌 줄 몰라도, 아니 두 날로 서 있을 줄만 알아도 낄 수가 있어서 좋다. 특히 운 좋게 여자애 뒤에 서거나, 뒤에 여자애가 매달리기라도 하면, 그냥 좋았다.      


   스케이트보다 더 신나고 흥분되는 놀이라면 단연 눈싸움이다. 밤새 눈이 오면 눈을 뜨자마다 문을 열고 일단 밖으로 나간다. 겨울이불 정도는 돼 보일 만큼 눈이 제법 두텁게 쌓였다. 아직 때 탄 데 없이 골목 전부를 폭신하게 덮고 있는 새하얀 눈을 이리저리 뽀드득뽀드득 밟고 뛰어다니다 보면, 어느새 발 시릴라 폴짝거리는 강아지와 한 팀이 되어있다. 그러다가 깜빡 잊기라도 한 듯 ‘눈 굴리기’를 시작한다. 담벼락에 기댄 채 추운 듯 몸을 맞대고 쌓여있는 연탄재 하나를 잡아서 발밑으로 냅다 던진다. 부서진 작은 조각을 하나 집어 심지로 삼아서 눈덩이를 만든다. 그래야 눈도 잘 붙고 큰 덩어리로 튼튼하게 잘 불어난다.

   근데 이것도 금세 시시해진다. 어느덧 골목에 나온 애들도 하나둘 늘어나면서, 누가 말하지 않아도 곧장 눈싸움으로 넘어간다. 바로 편이 갈린다. 이미 편은 정해져 있다. 싸움터는 세탁소, 슈퍼, 미장원, 성광교회가 각각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서로 마주 보는 네거리다. 아래위로는 비탈길이라 공평하지 않아, 좌우로 진영을 갈라선다. 슈퍼와 교회가 남쪽으로 한편이고, 세탁소와 미장원이 북쪽으로 한편이다. 남쪽 골목에 사는 애들과 북쪽 골목에 사는 애들이 서로 편을 먹고 눈싸움을 벌인다.

   나름 다 작전이 있어서 오합지졸처럼 중구난방으로 던지지 않는다. 우루루 다 같이 몰려가서 집중 투하하고 잽싸게 후퇴해서 사정거리를 벗어난 후, 안전지대에서 서둘러 실탄을 뭉친다. 공수 전환을 빨리하려고 아예 눈덩이만 만드는 조를 따로 두기도 한다. 좀 어린 애들더러 사정거리 밖에서 부지런히 눈을 뭉치게 한다. 그러다가 슬그머니 연탄재를 부숴서 눈덩이 안에 넣어서 특수탄을 제조하기도 한다. 중간에 열이라도 받으면, 그리 크지 않은 돌멩이도 넣었다. 연탄재 정도야 괜찮은데 재수 없게 돌멩이가 든 눈덩이를 얼굴에 제대로 맞으면 멍은 물론 피가 나기도 한다. 어느 편이든 누구 하나 특수탄에 맞아 ‘피를 보면’, 그야말로 순식간에 전쟁으로 돌변한다. 맞은 애 쪽 애들은 정의감에 불타서 어떻게든 복수를 해야 한다. 그게 맞아서 아파하는 친구에 대한 의리다. 어떨 때는 좀 큰 형들도 합세해서 큰 싸움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하루 종일 놀았다. 그때 겨울은 영하 15도가 보통이었다. 추웠지만, 추울 새가 없었다. 놀기만도 바빴다. 


#미아리의추억 #스케이트 #전승현 #눈썰매 #대나무스키 #눈싸움 

류해윤_雪山畵_종이에 아크릴릭_54*79cm_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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