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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창복 Sep 04. 2022

만화가게와 전파사

   이도 저도 안 먹히는 절박한 상황이 되면, 비상수단이라도 동원해야 했다. 아니, 비상 수단을 동원하기 전에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만화가게에 가는 거였다. 만화가게엔 만화만 있는 것이 아니고, 텔레비전이 한 대씩 있었다. 김일 선수의 경기가 있거나 이회택, 박이천 선수의 박스컵 축구대회라도 열리면, 만화가게 앞에 중계방송 일정을 써 붙여 놓았다. 박스컵이란, 골목에서는 ‘박 나랏님 사발 따먹기 공차기 대회’로 다소 길게 번역되던, 우리나라가 주최국인 아시아지역 국제축구대회였다. 만화가게에는 눈치 볼 어른도 없고 고만고만한 또래 애들만 잔뜩 모여 있으니 친구네 집에서 보는 거보다 훨씬 속 편하게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만화가게 출입이 여의찮다는 것이었다. 그때는 만화는 ‘불량’ 식품과도 같은 금지 대상이었다.     

   중학생이던 큰형은 길음시장으로 내려가는 비탈길에 있는 만화방에 자주 갔다.

   “또 만화방에 갔나?”

   형이 안 보이면 엄마는 표정이 안 좋아지고, 나에게 다 들리도록 형을 비난하며 화를 냈다. 그리고는 나더러 만화방에 가서 형을 찾아오라고 했다. 그게 정말 죽기보다 싫었다. 엄마가 부른다, 엄청나게 화났다, 아무리 말을 해도 형은 꿈적도 들은 척도 안 했다. 난 중간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더 불안하고 난감했다. 형 찾으러 보낸 나도 함흥차사니, 엄마는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라서 씩씩 소리를 내며 만화가게로 달려왔다. 그제야 형은 “이제 막 가려고 했는데” 하면서 엉거주춤 일어서기는 하는데, 만화책을 놓지 못하고 눈길은 여전히 만화책에 꽂혀 있었다. 기어코 마지막 남은 몇 장을 마저 다 보고서야 만화책을 놓았다.

   형도 사춘기 때 아니었을까 싶고, 엄마도 맏이의 반항에 어찌 대처해야 할지 몰라 난망했을 것 같다. 언제인지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엄마가 부지깽이를 들고 만화가게를 쳐들어가고서야 큰형은 만화가게에 발길을 끊었다.

   그때는 왜 그렇게 만화를 모질게 대했을까 싶다. 가난을 면하는 유일한 길이 공부였고, 그 공부시켜 ‘나처럼은 살지 않게’ 하려고 이렇게 아등바등하는데, 공부는 오로지 책을 보고 시험을 잘 보는 것이었다. 만화책은 공부와 관계가 없을 뿐 아니라, 공부를 방해하는 데다가 한번 발을 들이면 여간해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몹쓸 것일 뿐이었다. 아마도 요즘 젊은 부모들이 머스매들의 게임중독에 대한 착잡한 심정과 유사했으리라.


   그러니 웬만해서는 만화가게는 고려하지 말고 대책을 세워야 했다. 어떻게든 합법적인(?) 선에서 비장의 카드로 쓸 만한 비상 수단은 숙제해 주기였다. 그때는 학교에서 매일 낱말 찾기 숙제를 내주었다. 국어책의 범위를 정해주고 거기에 나오는 낱말 중에 뜻이 애매하거나 어려운 것들을 골라서 뜻풀이를 공책에 적어오는 숙제였다. 모르는 단어가 없다고 하면 숙제를 안 해가도 되지만, 선생님이 그리 호락호락할 리 없었다. 뜻을 알고 있는지 직접 물어볼 것에 대비하여 적당한 개수를 채워서 숙제의 분량을 타산해야 했다. 너무 적지도 많지도 않은 그야말로 ‘적당한’ 분량을 잡아내는 것도 사실은 중요한 실력이었다. 사회생활도 여기서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면, 애들은 일단 학교는 다니고 볼 일인 거다.

   그렇다고 일일이 사전을 뒤져 사전에 적힌 뜻풀이를 적어오는 애들은 없다. 형이나 언니가 있지 않은 한 국어사전을 가지고 있는 애들도 별로 없었다. 나야 형이 둘이나 있으니 국어사전쯤이야 당연히 있었다. 하지만 사전 종이는 질긴 습자지처럼 얇은데 두께가 엄청나고, 깨알 크기의 비슷비슷한 글자들이 빼곡히 적혀있어서 보기도 어려웠다. 만병통치인 전과가 있었다. 전과에는 국산사자음미실, 전 과목이 다 들어가 있어서, 전과만 있으면 숙제 걱정은 없었다. 어쩌면 선생님이 전과에 있는 것만 숙제로 내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당시로는 교과서 말고 유일한 부교재 참고서가 전과였다. 숙제하거나 시험공부를 할 때는 오로지 전과만 붙들고 씨름했다. 두껍고 무거워서 가방에 넣고 다닐 수가 없어 집에 두고 썼다.

   전과는 표준전과와 동아전과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항상 신학기가 되면 고민했다. 표준이야? 동아야? 문방구에 가면 두 가지가 다 쌓여있었다. 하지만 이 고민은 바로 풀렸다. 담임 선생님이 정해주었다. 아예 대놓고 “표준이다” 하는 쿨한 선생님도 있었고, 두 가지를 두루두루 공평하게 설명하면서 알아서 결정하라고 말은 하시는데, 잘 들어보면 한쪽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애들 절반 이상은 알아듣는, 그런 분도 계셨다. 눈치 모자란 나머지 절반은 알아들은 애들이 일러주었다. 이도 아니면 문방구 아저씨가 다 알아서 결정해 주셨다.

   “너 몇 반이냐?”

   “6반이요.”

   “6반? 음, 가만있자... 너넨 동아다.”

   아마도 문방구 아저씨는 담임 선생님의 의중을 미리 알고 계신 것 같았다. 전과 말고도, 전과의 부록 같기도 한 세트 메뉴가 있었는데 ‘수련장’이었다. 전과보다는 두께도 훨씬 얇았다. 일종의 워크북이자 문제풀이집 성격의 참고서였다. 형편이 되는 집 애들은 당연히 수련장도 장만하지만, 형편이 여의찮거나 공부에 별 취미가 없는 애들은 전과만 사고 수련장은 건너뛰었다.

   이 전과에는 단원별로 낱말 뜻풀이가 일목요연하게 적혀있고, 반대말, 비슷한 말도 일일이 다 챙겨놓았다. 그래서 죽 보고 뻔한 것들은 빼고 적당한 개수의 단어를 골라 그저 공책에 베껴 적으면 됐다.     

   동원할 수단이 여의찮고 중계날짜는 코앞으로 다가오고, 뾰족한 수를 내지 않고서는 도저히 타개가 어렵다는 비관적인 상황판단이 되면, 숙제를 대신해주겠노라고 제안했다. 하지만 이건 리스크가 있는 일이었다. 선생님을 속여야 하는 부담이 있어서, 들키지 않을 거란 보장이 있어야 먹히는 수였다. 그래서 공부를 제법 해서 평소 믿음이 있다거나, 공부와는 별개로 글씨를 좀 잘 쓴다는, 아니 비슷한 글씨체로 쓸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그나마 비상 수단도 여의찮으면 어떡하나? 그렇다고 김일 선수의 경기를 놓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경기가 끝나고도 한참 동안이나 애들 사이에서 김일 선수의 경기를 우려먹을 텐데, 거기에 끼지 못한다는 것은 나름 사회생활에 심각한 충격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마지막, 최후의 수단은 동네 전파사에 가는 거였다.

   전파사 진열장에는 텔레비전이 전시용으로 놓여있어서 진열장 앞에 서서 볼 수 있었다. 그것도 시간에 딱 맞춰 가면 어른들 등짝만 요리조리 피하며 감질나게 보는 둥 마는 둥 하다 와야 했다. 좀 이르다 싶은 정도로 일찌감치 가서 자리를 맡아야 하는데, 가면 또 비슷한 처지의 애들 몇은 와있었다. 동병상련의 신세가 되기까지의 나름 절절한 경위를 되짚으며 위로를 주고받다 보면 경기가 시작됐다. 서둘러 지나가던 아저씨들도 시계를 한번 보더니 포기했는지 바로 끼어들고, 어느새 애 어른이 뒤섞인 한 무더기가 마치 스크럼이라도 짜듯 한 몸이 되어 들썩였다. 이렇게 김일은 온 국민을 한마음으로 모으고 온 동네 사람들을 들썩이게 했다.     

   텔레비전은 놀라운 물건이었다. 애들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골목에서 애들과 섞여 뛰어놀던 애들을 한순간에 방구석에 몰아넣고,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텔레비전 상자 속만 뚫어져라 쳐다보게 했다. 친구들과 몸을 부딪치고 제 몸을 간수하기 위해 힘을 쓸 필요가 없어졌다. 경쟁의 치열함을 이겨내려 안간힘을 쓸 필요도 없어졌다. 온몸의 힘을 다하고 온 마음을 쏟을 기회가 사라졌다. 찰나의 결단도, 승리의 뿌듯함도, 패배의 좌절감도, 재도전의 오기도 느껴볼 수 없게 되었다. 편먹은 동료에 대한 의리도 배려도 쓸모가 없어졌다. 놀다가 다투고, 버티다가 화해하는 마음도 쓸 데가 없어졌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아직 대부분 애들은 여전히 몸을 써서 놀았다. 텔레비전은 그나마 형편이 되는 몇몇 애들에게만 해당하였고, 나머지는 아주 가끔 기회가 될 때만 허용되었다. 하지만 텔레비전은 이미 아이들을 골목에서 상자 속으로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골목에 나가 놀던 아이들을 상자 앞에 앉아 넋을 잃고 바라보는 아이들로, 무서운 속도로 바꿔놓기 시작했다. 


#미아리의추억 #만화방 #전과  #수련장 #전파사 #텔레비전

류해윤_청수계곡에 용수구폭포_종이에 수채와 아크릴릭_50*75cm_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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