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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창복 Oct 08. 2022

시골집

   방학이 되면 으레 시골에 갔는데, 이미 할아버지, 외할머니와 꽤 익숙하다는 점이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엄마, 아버지의 고향 집이지만 나로서는 낯선 곳이라 다소 생경할 수도 있었지만, 시골 고향 집에서 대장 격인 할아버지, 외할머니와 이미 충분한 교분을 가진 터라 믿을 구석이 분명해서 별 거리낌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여름이고 겨울이고 매번 방학이 되면 고향 집에 내려갔다. 그런데 웬일인지 내 기억에 남아있기로는 주로 외갓집에 갔던 기억이 대부분이다. 엄마 처지에서는 어린애지만 군식구 맡기기가 그래도 친정 쪽이 맘이 편했을 테니 외갓집으로 보냈을 거 같기도 하다. 그렇다고 할아버지가 살아계시는데 외갓집에만 다녀가는 것 또한 경우가 아니라, 아마도 친가로 먼저 가서 며칠 지내다가 외갓집으로 건너가서 더 오래 머물지 않았을까 싶다.     

   친가 외가 모두 합천으로 친가는 묘산면이고 외가는 쌍책면인데, 그 중간에 합천읍과 율곡면이 자리 잡고 있지만 그리 먼 거리는 아니었다. 언젠가 친가에 갔을 때, 동네 아줌마들이 날 보고 신기해하며 내 머리를 쓰다듬고 반가워했다.

   “하이고 니가 이착양반 막내가?”

   “그래? 빨갈 때 올라간 기 이래 컸나?”

   여기서 이착양반은 아버지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럼 엄마는 이착띠기가 된다. 이착댁의 댁(宅)을 사투리로 하면 띠기가 되는 것이고, 이착은 엄마의 고향마을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외갓집은 쌍책면인데 왜 이착띠기지? 쌍책띠기가 아니고?’ 하는 나름 합리적인 의문을 품었지만, 외갓집 가면 물어봐야지 하고 넣어두었다. 외삼촌 말씀에 따르면 옛날에는 여기가 이책면이었는데, 언젠가 초책면과 합병이 되었단다. 이책과 초책을 합쳐서 쌍책이 된 것이다.

   그런데 시골 고향 집에 가면 이해도 안 되고 참 난감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야가 나이는 어리도 너한텐 아재뻘이다”

   나보다 한참 어린애들한테 존댓말을 쓰라는 것도 이상한데, 아니 글쎄 아재(아저씨)라 부르라는 것이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고향 집 마당에 자주 드나드는 어떤 아저씨는, 아버지보다 훨씬 젊은 청년인데도 나한테는 할배뻘이라고 했다. 우리 집안이 집성촌인 고향 동네에서 족보상 종손 쪽 줄기에 가깝다 보니 항렬(行列)이 낮았다. 일 년에 한두 번 가끔 보는 친척들의 촌수도 복잡해서 헷갈렸지만, 그보다는 나이와 위계가 도무지 상식적이지 않아 어색하고 불편했다. 호칭이 마땅치 않아 주저하게 되니 말을 섞을 기회도 잘 안 생기고, 또 데면데면 얼굴만 보고 있자니 어색해서, 자연스레 동네 사람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피하곤 했다. 하지만 한두 해 와서 지내다 보면 그런 어색함도 시나브로 사라진다. 항렬 높은 애들은 일단 손위 호칭으로 불러주고, 그다음은 편하게 애들끼리 반말을 쓰면 되었다. 어른들이야 아재건 할배건 그냥 존대하면 되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외가에 가면 논두렁 주변에 강아지풀이 지천으로 자란다. 꽃이 강아지 꼬리처럼 길쭉하니, 털이 복슬복슬해서 붙여진 이름인가 보다. 꽃 밑 목덜미 께를 엄지 검지로 잡아서 당기면 쭉 소리가 나며 미끄러지듯 뽑혀 나오는데, 그 길이가 보통 1m 정도는 되었다. 숱이 많아 탐스러운 눈썹처럼 둥글게 수그러지는 꽃술의 상단을 잘라내고 남은 꽃술을 입에 물어서 침을 잔뜩 발라서 낚싯대인 양 논 안으로 살며시 들이민다. 그러면 얼마 있지 않아도 개구리가 덥석 무는데, 그때 재빨리 강아지풀을 획 잡아당기면 개구리는 풀을 문 채로 엉겁결에 딸려 나온다. 

   그래도 물고기 낚시처럼 바늘로 꿴 것이 아니라서, 개구리가 바로 정신을 차리고 물고 있는 강아지풀을 뱉고 냅다 튀면 되는데, 애들이 민첩해서 여간해서는 그 틈을 놓치는 법이 없다. 졸지에 논에서 길바닥으로 끌려 나앉은 개구리는 정신을 차릴 겨를도 없이 바로 애들 발에 밟히고 만다. 걔 중에는 몸통을 정통으로 밟혀 배가 터져 내장이 보이기도 하는데, 애들은 전혀 개의치 않고 나 보란 듯 필요 이상으로 더 낄낄대며 내 표정을 살폈다. 심지어는 잡은 개구리들을 왕골 줄기에 두루미로 죽 엮어서 바닥에 패대기를 치기도 했다.     

   서울 촌놈 기죽일만한 게 뭐가 있을까 궁리했을 애들이니 평소보다 더 유별나게들 했을 거다. 나도 몇 번 따라 해 보았지만, 강아지풀을 물고 나온 놈을 차마 밟을 수가 없어서 매번 놓치고 말았다. 그럼 애들은, 그럼 그렇지 걸려들고야 말았다는 듯이 서울 촌놈의 약점으로 잡고 놀려댔다. 하지만 놀림 받는 게 약 오르거나 노엽지 않았다. 애꿎은 개구리를 잔인하게 밟아 죽이는 것도 그렇고, 죽여 놓고 킬킬대는 애들이 도무지 이해되질 않았다. 그 무지함이 한심스러웠다. 이렇게 도덕적 우위에 딱 서고 보니 애들의 놀림이 오히려 하찮았고 별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거만한 체를 한다거나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지 말아야 한다는 정도의 철은 나에게 있었다.     

   애들은 서울 촌놈에 대한 궁금증과 부러움도 있었을 테지만, 대놓고 드러내기보다는 아웃복싱 하듯 약간의 거리를 두고 툭툭 건드려보며 간 보고 있었던 거다. 훅 들어오지 않고 맴도는 그 거리감이 나 역시 싫지 않았고 편했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다. 애들인데다가 다들 웬만하면 8촌 이내의 친척 간이라, 몰려다니다 보면 금방 거리가 좁혀지고 허물없이 킬킬대며 지내게 된다. 그런데도 내가 강아지풀 낚시를 끝끝내 하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개구리 생명에 대해 애틋함이라기보다는, 강아지풀을 입에 넣고 침을 흥건히 바르는 게 몹시 비위가 상했다. 보지 않으려 해도 자꾸 연상이 되고, 그 침을 개구리가 덥석 받아먹었다고 생각하니 곧 토라도 나올 것만 같았다. 암튼 강아지풀로 하는 개구리 낚시는 그날로 끝이었다.          

   외갓집은 농사 말고도 돗자리를 짰다. 들에 가면 왕골이 큰 애들 머리까지 올라오도록 자라는데, 다 자란 왕골을 베서 어느 정도 말린 다음 대청마루에 늘어놓고 이른바 ‘골째기’를 한다. 왕골 줄기의 껍질을 벗겨내는 것인데, 손에 딱 잡히는 작은 칼을 쥐고 껍질을 찔러 찢어내면 쫙쫙 소리가 나면서 벗겨지는데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었다. 벗겨낸 껍질의 폭이 너무 좁으면 쓸모가 없으므로 적당한 폭으로 째는 게 기술이다. 세 번 만에 다 벗겨내는 정도면 적당한 크기라 할 수 있었다. 

   째낸 껍질을 모아놓고 그늘에서 말리면 반질반질한 겉껍질이 안으로 오그라들면서 통통한 모양으로 된다. 이걸 실 삼아 길쌈하듯 짜면 돗자리가 된다. 아마도 제법 돈벌이가 되는 농사였고, 합천지역의 특산품이었나 보다. 나 역시 이런 노동에 재미를 잘 붙이는 데다 또 하면 잘했다. 외갓집에 가면 난 항상 골째기를 했고, 어른 절반 몫은 너끈히 해냈다. 방학 마치고 집에 올 때면 외숙모는 꼭 완성된 돗자리 한두 장을 말아 챙겨주면서 나의 수고를 치하했다.

   “이건 니가 짠 기다”     


   세탁소에서 물빨래와 수선 일을 전담했던 엄마는 가게가 자리 잡혀갈수록 일을 감당하기 벅찼다. 수선이야 엄마 손이 워낙 야무지고 빨라서 금방금방 해냈지만, 물빨래는 물 세탁기가 없었을 때라 일일이 물에 담가 손으로 빨아야 했다. 더운물도 가게 화덕에 물 솥을 얹어 데워서 써야 해서 일감이 많을 때는 감질나는 정도라 겨울에도 찬물에 손을 담가 빠는 일도 다반사였다. 애들은 또 하루가 다르게 쑥쑥 커갈 때라 손도 많이 갈 뿐만 아니라 버거웠다.     

   이렇게 세탁소 꾸려가랴 한창 크는 애들 챙기랴 하루하루가 힘들었을 엄마 처지에서 한 달이 넘도록 애들이 학교 안 가고 집에 들러붙어 있다는 것은 엄마로선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일이었다. 선생이 미칠만하면 방학하고 엄마들이 미칠만하면 개학한다고 하지 않던가. 그렇다고 애들을 아무 곳에나 보낼 수도 없고 보낸다고 받아줄 리도 없다. 시골집에 보내는 거 말고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내가 중학생이 되면서부터는 방학 때 고향 집에 내려가지 않았다. 머리 큰 놈들이 달포 가량이나 내려가 있는 것이 없는 시골 살림에 숙모들에게도 적잖이 폐가 될 거란 사실은 불 보듯 훤한 일이라, 엄마는 아무리 힘들어도 내려보내는 일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나 역시 중학생이 되면서 공부에 대한 부담도 생기기 시작한 터라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고 여겼다. 


#미아리의추억 #시골집 #왕골 #외갓집 #방학 #강아지풀       

류해윤_내가 살던 고향 추수하는 농촌마을_종이위에 아크릴릭_82*150_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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