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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창복 Feb 02. 2023

봄들기

   따고 잃고 하는 일 없이, 아주 평화로운 구슬 게임도 있다. ‘봄들기’라는 놀이인데 평화롭다 못해 한가롭다고 할까. 하지만 구슬 놀이의 기본기를 익힐 수 있어서, 구슬계에 입문하는 어린애들에게는 필수코스의 놀이다. 알밤 때리듯이 구슬을 엄지와 장지 손톱 사이에 끼고, 구슬을 보내고 싶은 지점까지 거리 측정을 정확히 해서 튕겨내듯 던지는 정교한 기술을 연마할 수 있다. 홀짝이나 쌈치기처럼 따먹고 따먹히는 그런 게임과는 차원이 다르다. ‘봄들이’라 부르기도 했는데, 일단 따뜻하고 인문적인 느낌이 물씬하지 않나.


   흙 마당에 지름 10cm 정도의 작은 구멍을 십(十)자로 5개를 판다. 작대기로 땅을 파내고 발뒤꿈치로 돌려가며 다져서 근처에 도달한 구슬이 잘 굴러떨어지도록 한다. 다섯 개 구멍 중에 가운데 구멍을 ‘집’이라 하고, 주변의 동서남북 방위에 각각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이름을 붙인다. 집을 중심으로 주변 4방위의 집을 모두 다녀오면 4계절을 다 돌게 되니 1년살이를 한 것이 된다. 공기놀이와 마찬가지로 게임 전에 5년 살이, 10년 살이 등 기준을 정하고 먼저 나면 게임이 끝이 난다.

   한 번 던져 바로 구멍에 들지 못하면 구슬이 떨어진 그 자리에서 다음 차례가 오기를 기다려야 한다. 그런데 다음 순번의 주자가 구멍 주변에 대기 중인 구슬을 맞추면 구멍에 넣은 것으로 간주하여 다음 구멍으로 건너뛰어도 된다. 그래서 한 번에 바로 구멍에 들지 못하더라도 다음 주자로부터 저격당하지 않고 살아남으면, 목표 구멍에 훨씬 가까운 위치에서 재차 시도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때 본의 아니게 (때론 부러) 욕심에 이끌려 사달이 벌어진다. 이른바 ‘말좆부리기’라는 일종의 반칙 시비다. 구슬이 놓인 딱 그 자리에서 조준해야 하는데, 구멍에 조준하면서 자연스레 구슬을 쥔 손과 팔이 구멍을 향해 ‘슬그머니 뻗치게’ 된다. 그래서 조금만 뻗칠 조짐만 보여도 주변에서 바로 “말좆부리지 마~” 라고 외치며 견제한다. 좀 거식하지만, 슬그머니 뻗어 나오는 손을 보면, 그 이름이 참으로 적절하여 감탄이 절로 난다.

   그런데 ‘말좆’을 원천적으로 방지하는 장치가 도입되었다. 구슬을 쥔 손의 새끼손가락으로 하여금 구슬이 있었던 지점을 딱 짚고 떼지 않은 상태에서 구슬을 튕기도록 하는 규칙이다. 그러면 말좆은 커녕 꼼짝달싹도 못 하고 원래의 제 자리를 벗어나려야 벗어날 도리가 없다. 그런데 새끼손가락을 땅에 고정하고는 구슬을 잡고 있기도 부자연스럽고 튕기기엔 더더욱 불편하다는 민원이 불가피하다. 그래서 나온 보완책이 땅을 짚는 의무는 구슬을 쥐지 않은 손의 새끼손가락에 떠맡기는 거다. 대신 구슬을 쥔 오른손의 새끼손가락으로 땅 짚고 있는 손의 엄지를 걸고 그 상태에서 구슬을 튕기게 했다.(이걸 ‘솔롱’이라고 했다는데?) 구슬을 던지는 손이 매여 있기는 매한가지여서 여전히 불편하기는 한데, 그래도 땅 짚은 손의 엄지와 새끼 사이 한 뼘 길이만큼의 공간적인 여유가 생기니까, 구슬을 겨냥하고 튕기는 데에 다소나마 운신의 여지가 생겼던 거다.     


   딱지나 홀짝, 쌈치기가 주로 운에 의존한 심리 게임에 치중하는 놀이라면, 삼각형이나 봄들기 같은 구슬놀이는 심리에 더해 신체적, 감각적 노력을 통합적으로 수행하는 놀이이다. 구슬이라는 아주 작고 동그란 모양의 도구를 이용하다 보니 동작도 정교해지고, 감각도 섬세하게 계발되지 않을 수가 없다. 또한 구체적인 보상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하다 보니 최선을 다해 집중하는 마음이 생기고, 결과로 주어지는 보상과 보람을 맛보게 된다. 어린 시절 내 몸을 균형 있게 만들고 마음을 영글게 했던 것은 골목에서 애들끼리 함께 했던 이런 놀이 덕분이었다.


#미아리의추억 #봄들기 #봄들이 #구슬 #말좆부리기 

류해윤_통일동산_종이에 아크릴릭_87*176cm_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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