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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나

은행 일

by 갱쥬

"oo아, 오늘 은행 일 봐야 하니까 학교 끝나고 바로 집으로 오자. 알겠지?"


본격적으로 엄마를 도와 은행업무를 보게 된 건 중학생 때였다. 은행 업무는 언니와 내가 어느 정도 자란 후에 가능했던 꽤나 레벨이 높은 영역이었다. 어느 정도 셈을 할 줄 알아야 하고 입금, 출급, 계좌이체 같은 어려운 말이 뭘 뜻하는지 알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중학생이 되기 전에는 감사하게도 이모와 엄마 친구께서 주로 일을 봐주셨다.


사실 은행 일과 관련된 썰로는 내 에피소드보다는 언니 지분이 더 많다. 예를 들어 친구랑 놀다가 엄마랑 아침에 한 약속 잊어먹고 놀러 가버리기. 다음번엔 그 전날부터 말하고 아침에도 말해줬는데 홀랑 까먹고 친구랑 놀러 가기. 평소에는 하교할 때 은행 앞으로 지나가면서 약속한 날에 하필 다른 길로 가버리기 등등. 이쯤 되면 언니가 엄마한테 감정이 좋지 않은가 싶을 정도로 엄마에게 똥을 선사한 나날들이 많았는데 그녀는 그저 순수하게 잊은 것뿐이었다. 하지만 이 글은 엄마와 나의 이야기를 푸는 공간이니 나와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언니 이야기는 나중에 엄마 입장에서 한 번 풀어보고 싶은 생각도 있다. (지금은 핸드폰 없는 중학생이 없지만 우리 때는 고등학생이나 돼야 핸드폰을 가질 수 있었다. 옛날 드라마처럼 바로 옆에 있어도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리고 있어서 엇갈리는 상황이 충분히 가능하던 시절이었다.)


본격적인 은행 업무는 중학생 때였지만 이모들이 도저히 시간이 안 되는 날엔 초등학생 때도 가끔 엄마 따라 은행을 가곤 했다. (이모들도 언니와 내 또래의 애들을 키우고 있어서 항상 바쁘신 와중에 시간을 내셨었기 때문이다.) 초등학생 꼬맹이에게는 주로 통장정리 같은 간단한 업무가 주어졌지만 그날은 사안이 좀 복잡한 업무를 맡게 됐다.


그때의 일이 정화하게 기억이 나진 않아서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날 엄마와 나는 집에서 버스 타고 30분 정도 떨어진 곳에서 은행 일을 보고 있었다. 은행 창구도 없고 atm 기계만 있는 365 코너에서.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내게 주어진 미션은 계좌이체였다. 통장정리나 하던 쪼렙이 갑자기 atm으로 하는 은행 업무 중 가장 고난도 업무를 맡게 돼서 굉장히 떨렸던 기억이 있다. 계좌이체... 계좌이체가 어디 있지. 화면에서 단어를 찾았는데 보이지 않았다. 옥수수에서 두 번째 '수'와 세 번째 '수'가 다른 말인 줄 알았던 꼬맹이 시절도 아니고 화면에 있는 글씨를 전부 소리 내어 읽어봤지만 계좌이체를 찾을 수 없었다. 설상가상 그 365 코너에는 기계가 하나뿐이어서 엄마와 내가 헤매고 있는 사이에 사람이 오면 차례를 양보해야만 했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계좌이체를 찾느라 시간을 지체하고 또 몇 번의 양보 끝에 부아가 난 엄마는 이번에야 말로 결판을 내리라 다짐하셨다. 정확하게 아닌 버튼을 제외하고 이것저것을 다 눌러 읽어보게 했고 뒤에 사람이 와도 더 이상 양보를 하지 않았다.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저때만 해도 월초나 월말에 은행 업무를 보는 사람이 몰려 줄을 서는 경우가 많았는데 저 때 우리의 시점이 월말이었다. 그렇게 한 명 두 명 뒤에 줄을 선 사람이 늘어났고 마침내 왜 이렇게 오래 기다리냐는 웅성거림이 크게 들릴 정도로 4-5명의 사람이 우리 뒤에 서게 되었다.

엄마는 잘 안 보이니까 나한테 의존할 수밖에 없고. 나는 나만 잘하면 되는 이 상황이 너무나 버겁고. 망할 놈의 계좌이체는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고. 결국에 뒤에 있는 여자분이 나서서 알려준 끝에 상황의 진척이 있을 수 있었다. 계좌이체는 '예금이체'라는 글자 안에 숨어 있었는데 동네에 있던 기계와 달라서 엄마도 '이' 이체가 '그'이체였는지 미처 몰랐던 상황이었다. 이제 내가 버벅거리지 않고 계좌번호와 금액만 입력하면 되는데 뒷사람들이 기다린다는 압박에 몇 번을 잘못 눌렀다. 보다 못한 뒤의 여자분이 다시 도움의 손길을 건넸고 망신창이가 된 우리 둘은 atm기 앞에서 드디어 탈출할 수 있었다. 지친 몸과 마음을 이끌고 집으로 향하는 길에 스스로를 탓하는 나를 엄마는 내내 다독이셨고 집에 도착해서는 고생한 나를 위해 나의 소울푸드인 치킨을 시켜주셨다.


어렸을 땐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니까 별 생각을 안 했는데 커서 보니 쪼끄만한 애한테 어른의 일을 시켜야만 하는 엄마 마음이 참 무거웠을 것 같다. 내가 잘못 눌러서 자책하면 달래느라, 뒷사람들한테 양해 구하느라 미안해하랴. 나는 이날 치킨에 콜라 마셨는데 엄마는 치킨에 술 한잔 하지 않으셨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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