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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지수 Oct 24. 2023

[전세지옥 B컷] 자살 시도가 자산이 될 줄이야

  회사를 다닐 때부터 삶에 대한 미련과 희망보다 당장의 고통이 더 클 때면 리첸스 빌라의 옥상에 올라가곤 했다. 전세사기에 유독 힘들었던 그날도 답답한 마음에 술을 마시고 옥상에 올라갔다. 어두운 밤의 옥상에서 바라본 어두운 하늘과 어두운 밤거리는 블랙홀처럼 나를 빨아들였다. 내 무의식의 달콤한 속삭임이 들린다. ‘일로 와 한 번만 뛰어내리면 편해. 모든 게 다 일순간에 끝날 거야.’ 


 실제로 옥상에서 사다리를 타고 더 올라가 케이블티비 송신기가 있는 엘리베이터 실 위의 난간에 올라섰다. 비현실 적인 상상이 시작된다. 여기서 뛰어내리면 게임처럼 로그아웃 되고 태초의 마을로 돌아가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R. Kelly의 I Believe I Can Fly를 듣는다. I believe I can fly. I believe I can touch the sky. Spread my wings and fly away. 여기서 점프를 하면 숨겨 있던 날개가 옆구리에서 돋아나 하늘을 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날 이후로 당분간은 술을 마시지 않았다. 홧김에 극단적 선택을 할 것 같았다.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은 많이 하지만 입 밖으로 자살하고 싶다는 말을 내뱉지는 않으려고 노력했다. 말이 씨가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지금까지 세 번 자살시도를 한 경험이 있다.

 세 번 다 나의 학창 시절이었다. 껌 하나도 반씩 나눠 드시는 검소한 어머니의 배곯는 헌신으로 최고의 중등 교육을 받았지만, 그 병적인 헌신은 오히려 나를 옭메었다. 어머니는 내가 좋은 대학에 나와 좋은 직장에 다니길 원했고 그 바람은 내게 학대로 이어졌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학원 다섯 개를 다니기 시작했고, 초등학교 6학년 때 학원의 성지인 대치동으로 이사를 해 공부를 강요당했다. 부모님은 나의 성공을 위해 아낌없이 밀어주셨지만 정작 나는 부모님께 등 떠밀려 벼랑 끝까지 갔었다.


 훗날 헝가리에서 전기 자동차용 배터리 팩을 만드는 공장에 견학할 기회가 있었다. 얇은 알루미늄을 500톤짜리 프레스기로 압착해서 틀을 만드는 작업이었다. 틀로 내려 찍은 알루미늄은 원하는 모양이 나와야 하지만, 어려운 작업으로써 불량품이 되어 버려지는 배터리팩은 40%에 달했다. 그 작업을 보고 내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나도 대치동이라는 학원 공장에서 제대로 찍히지 않고 불량품이 되어버린 하위 40% 같은 처지였다. 나는 버려져야 했지만, 어머니의 잘못된 욕심과 과도한 사랑은 나를 계속해서 500톤짜리 프레스기로 찍어 댔다. 한 번도 양품이 되지 못한 나는 계속해서 불량품으로 남아 끝없이 삐져나갔다. 부모님께 나는 알루미늄 원재료와는 다르게 쉽게 버릴 수 없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기 때문이다. 내 학창 시절은 학교와 학원으로만 기억된다. 방학 때면 기숙학원에 들어갔다. 방 안에서 문을 잠그고 공부하는 척하고 침대에 누워있으면 어머니는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왔다. 문 열쇠 소리가 들리는 틈에 의자에 가서 앉았으나 내 눈은 졸음에서 막 깬 상태의 동태 눈깔이었고 어머니는 수동 열탐지기처럼 침대에 손을 올려 열을 확인하고는 내 등짝에 시원한 스매싱을 선사했다.


 한 번은 학원이 너무 가기 싫어 피시방에 간 적이 있다.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져서 오른쪽을 쳐다보니 디아블로 같은 얼굴 표정을 짓고 있는 어머니가 있었다. 아직까지도 그런 무서운 얼굴을 본 적이 없다. 도살장으로 향하는 소처럼 피시방에서 끌려 나갔다. 어머니는 내게 함께 다리로 가자고 했다. 그리고 도착한 다리에서 어머니는 함께 떨어져 죽자고 했다. 그 사건은 아직도 나에게 큰 상처로 남아 있다.(후에 알고 보니 어머니는 당시에 아버지 사업 실패로 본인이 빚을 갚고 있었으며 당신도 죽고 싶을 정도로 아주 힘든 시간을 보내고 계셨다.)


  싫어하는 공부를 하다 보니 몸이 안 좋아졌다. 발목이 아파 한의원에 가면 맥을 짚어보더니 위가 불타오르고 있다고 스트레스받냐 물었다. 머리를 깎으러 미용실에 가면 두피가 멍게처럼 빨갛고 두드러기가 많다고 스트레스받냐 물었다. 이빨을 때우러 치과에 가면 잇몸이 탱탱 부어 있다고 스트레스받냐 물었다. 틱장애, ADHD, 우울증, 애정결핍 등 사춘기 청소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심적 질병은 다 겪었다.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진 않았지만 망상을 했고 이때 약간 정신이 이상해졌다. 대학에 한 번에 가지 못하였고 고등학교 4학년, 5학년이 되었다. 나는 삼수를 하였다. 그 길었던 수험 시기에 한 번은 뉴스에서 본 겨울철 노숙자 동사가 떠올랐고 비가 내리는 추운 가을날 집 주변의 중학교 건물과 운동장 사이 으슥한 공간에 누웠다. 서서히 죽음을 기다리며 두 시간 정도 천천히 주마등을 경험했다. 문득 자살 시도하기 전에 다운로드한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가 생각났다. 이 영화를 보면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첫 번째 자살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집에 가서 따듯한 물에 샤워하고 영화를 봤다. 영화 속에서 큰 깨달음이나 힘을 얻지는 못했지만, 삶의 미련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봤다. 


 나머지 두 번의 자살시도 장소는 영동대교였다. 두 번째도 비 오는 날이었는데 영동대교에서 한강으로 빠지려 했더니 문뜩 내가 수영을 잘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수영장에 갈 때 유일하게 싫은 건 입수하는 순간 차가운 물이 내 몸을 감쌀 때다. 영동대교 밑의 한강에 빠진다고 죽지도 않을 거 같고 춥기만 할 거 같았다. 그래서 자살은 포기하고 내 우산 밑에 혼자만의 노래방을 열고 크라잉넛 노래 '말 달리자'를 목이 피날 때까지 부르며 스트레스를 풀고 집에 돌아왔다.


 마지막 시도는 영동대교를 빠르게 지나가는 대형 트럭에 뛰어드는 것이었다. 실제로 한 번 뛰어들려고 움찔했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움찔하는 제스처에 대형 트럭 기사가 반응하여 사고가 날 뻔했다. 차에 치이는 것은 무서웠고 나 때문에 남들이 피해를 보는 것도 미안해서 난 자살하지 않았다(못했다).

죽지 못했으니 정말 죽을 만큼 힘들지는 않았던 것 같다. 또한, 죽음에도 용기가 필요하고 그런 용기가 내게는 없었다. 죽을 용기가 있으면 그 용기로 살아가면 된다. 한창 자살하고 싶었던 학창 시절, 마포대교 자살방지 펜스와 문구가 생겼다고 해서 가보았다. 자살을 하러 간 거는 아니고 위로를 받고 싶었다. 슬픈 내 감정을 펜스에 쓰여있는 ‘밥 먹었니’ 한마디가 보듬어 주었다. 다리를 건너고 다시 돌아오는 동안 계속 울었다. 다리를 왕복했을 땐 다시 살아갈 용기를 찾았던 기억이 있다.


 그로부터 10년이 넘은 지난 2023년 5월 즈음, 전세사기 피해자 주제에 한강 자전거 라이딩을 갔다. 그 시간에 빚을 갚으려 자전거 배달이라도 한 건 해야 하는데 말이다. 전세사기 피해자에 카드사에 천몇 백만 원의 빚이 남아있어도 하루 정도는 시간을 내 빚을 갚기보다는 용기를 얻기 위해 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예전에는 한강에서 성수를 지날 때마다 강변에 우뚝 솟아있는 트리마제 아파트를 보며 언젠간 꼭 저곳에 살겠다고 다짐했다. 이날도 역시 성수를 지나가는데 트리마제가 유독 강변에서 더 멀어져 보이게 느껴진다. 이번 라이딩에서는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나중에라도 살겠다고 다짐할 엄두도 좀체 나지 않았고 그렇게 트리마제가 내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나 버렸다.

 여의나루역 한강공원 앞, 웃음꽃을 피우며 세상 행복하게 피크닉을 즐기는 젊은 청춘남녀들 사이에서 더 이상 청춘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는 나는 실패하고 초라하기까지 한 아저씨의 모습을 하고 벤치에 앉아 맥주를 한 캔 마셨다. 운동을 하고 갈증이 심할 때는 술을 입에만 대도 정신이 몽롱해진다. 마포대교 자살다리를 찾아갔다. 이번에도 자살방지 문구를 보며 학창 시절 때처럼 삶에 대한 용기를 얻을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내가 간 마포대교에는 더 이상 자살방지 문구가 없었다. 슬펐다. 이제는 누가 나더러 밥 먹었는지 물어봐줄까. 엄마, 아빠, 누나가 보고 싶다. 누나와 아빠는 100번 정도는 족히 물어봐 줄 것이다. 엄마는 당신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때까지 천만 번이라도 더 물어봐 주실 거다. 나를 사랑해 주는 가족들을 생각해서라도 나쁜 마음을 품지 말아야겠다.


 돈은 중요하다. 있으면 좋고 많이 있으면 더 좋다. 없으면 슬프다. 하지만 돈이 없다고 빚이 생긴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많다고 목숨이 하나 더 생기는 게 아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소중한 생명, 삶, 인생. 전세사기를 당해 내 인생이 송두리째 뽑혀 나갔어도 어쩔 수 있나 그냥저냥 살아야지. 살다 보면 다시 웃을 날 오겠지. 학창 시절 자살 시도 경험과 죽음에 마주한 경험은 현재의 내게 자산이 되어 죽고 싶은 지금의 삶을 지탱해 줄 버팀목이 되었다. 


자살 시도가 자산이 될 줄이야. 


과거의 내게 정말 고맙고 미래의 나에게 너무 미안하다. 힘든 순간은 반드시 지나갈 것이고 그때 난 더 강해질 것이다. 실제로 과거 자살 시도 이후의 시간에 몇몇 아름다운 순간을 경험하며 ‘살아있길 잘했다’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아무도 없는 새벽 바티칸 성당 앞의 그 넓은 광장에서 혼자 기도할 때, 여자친구가 에펠탑을 바라보며 이쁘다고 말한 순간 나는 네가 더 이쁘다는 대답을 했고 그 말을 들은 여자친구의 얼굴 표정을 봤을 때, 호주 케언즈에서 스쿠버다이빙을 하며 물속에서 로뎅의 '지옥의 문'처럼 생긴 장엄한 절벽을 만났을 때, 군대 전역날 소대원들에게 배웅받으며 위병소를 나설 때, 일본 후지산 정상에서 일출을 바라볼 때, 취업 합격 전화를 받은 순간, 첫 월급으로 부모님께 용돈을 드렸을 때, 스위스에서 새벽에 달빛으로 샤워를 하며 산책하고 이어폰에서는 조승우가 낭독하는 알퐁스 도데의 ‘별’이 흘러나왔을 때, 철인 3종 경기 결승선을 통과할 때, 부다페스트 다리 위에서 여자친구와 불꽃축제를 봤을 때 그리고 비행기를 타고 조종사가 되는 꿈을 꿀 때. 


 이처럼 내가 그때 자살하지 않고 살아남아 그때 죽지 않길 잘했다고 스스로에게 증명하며 살 수 있었기 때문에, 앞으로 경험할 아름다운 순간들을 마주치기 위해 전세사기 따위에 내 소중한 목숨을 포기하지 않고 존버하며 더 열심히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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