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버는 때가 오더라.
삼성역에서 일산 가는 콜이 떴다. 사실 이런 콜은 드문 케이스다. 일산 사는 분들은 마포나 종로 쪽으로 오지 삼성역까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대부분 삼성역에서 잡히는 장거리는 남영주나 구리시 같은 경기 남동부 쪽이 많다. 일단 단가가 괜찮았다. 날씨도 따뜻했고, 무엇보다 왠지 그냥 오늘따라 멀리 가고 싶었다.
보통 기사들은 콜을 잡은 후 이동하기 전에 전화를 한다. 가다가 취소를 하면 낭패를 보기 때문에 취소하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성이고 성격 급한 분들을 위한 배려이다. 그런데, "띠링" 앱을 통해 문자가 왔다. "세븐일레븐 1층 편의점으로 오세요. 차량 번호는 0000입니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어떤 손님일까 큰 호기심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60대 중반 사장님이셨다. 설날을 맞아 친구집에서 오랜만에 회포를 풀고, 잠을 푹 잤는데 일산까지 운전하기가 너무 귀찮아서 대리를 부른 손님이셨다. 말투도 그렇고, 60대 중반 이상의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깔끔하게 차려입은 청바지, 고급 해외 명품 브랜드 점퍼, 누가 봐도 돈 많은 사장님 같은 포스였다.
이분과의 대화는 의외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말투가 딱 나의 고향 말투였기 때문이다. 고향을 맞추고 나니 그분께서 지긋히 감았던 눈을 떼며 반갑게 나를 쳐다본다. 이분도 역시나 똑같은 말, 대리기사를 전업으로 하는 것 같지 않다면서 대리하는 이유가 따로 있냐고 묻는다. 차마 책을 쓰고 있다는 말은 못 하고, 다만, 대리를 통해 좀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고 했다. 이제는 아예 잠을 깬 상태로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쳐보다 보셨다. 하기사 대리기사님들 중에 대기 시간 책을 읽는 분은 많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콜 하나 더 잡기 위해 휴대폰을 하루종일 쳐다보니 책을 볼 시간이 없을 것이다. 근데 나는 책을 갖고 타니 이게 뭔가 싶었을 것이다.
95년 베트남과의 수교 때부터 베트남에 진출한 사업가셨다. 골프장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업을 베트남에서 하고 있으며 누가 봐도 꽤 큰 부를 이루신 분이다. 베트남에 가게 된 이유는 여러 우여곡절이 있겠지만 수교 초기부터 베트남에 갔던 것은 지금 생각하면 신의 한 수였다는 것이다. 그 당시 누가 알았겠는가? 베트남이 이렇게 폭풍 성장 할 줄은... 이분에게도 큰 모험이었을 것이다. 95년 한창 우리나라도 크게 성장하고 있는 시기였는데 도박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니깐.
한국에 다시 완전히 정착은 언제쯤 할 거냐고 물었다, 나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고국에서 노후를 맞이하고 싶지 않았을까? 생각했으니. 나이가 들면 의료 시스템도 중요하고 무엇보다 친구나 부모 형제들이 다 한국에 있을 텐데 어느 정도 부를 이루면 한국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손님은 그냥 웃으신다. "전 한국이 답답해요~. 사람들도 답답하고, 환경도 답답하고. 그냥 베트남 있으렵니다. 의료? 에이 요즘 한국 병원들 베트남에 엄청 진출했어요? 저기 양지병원 알죠? 올해 베트남에 진출했는데 베트남 하노이 중심가 임대료만 월 몇억이에요. 엄청 잘해놨어요. 오히려 한국보다 더 좋아요.. 허허허 허"
환율 때문에 물가가 예전에 비해 많이 비싸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매력적인 곳이 베트남이라고 한다. 특히, 대기업들의 해외 주재원 국가로 영국, 미국 같은 선진국이 인기였는데 이제는 베트남이 최고 인기라고 한다. 한국보다 낮을 물가, 안전한 치안, 그리고 무엇하나 한국에 비해 부족함 없는 사회 기반 시설, 자기가 베트남에 진출할 때는 이게 맞나 싶을 정도로 의구심이 컸는데 이게 신의 한 수였다고 한다.
너무 부럽다고 말씀드렸다. 진짜 부러웠으니깐... 주차를 하고 내리는 대뜸 악수를 건넨다. 사실, 손님이 대리기사에게 먼저 악수를 건네는 경우는 드물다.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나도 처음 겪었으니깐. 아마도 수십 년 전 떠난 고향이지만 그래도 고향후배에 대한 정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돈은 항상 기회가 와요. 지나고 보면 그때가 기회인지 모르지. 그런데 항상 준비를 해야 해. 그래야 기회를 잡을 수 있어." 40대 중반, 나에게는 그 기회가 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