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전류가 처음 깜빡였던 날
처음에는
그냥 “피곤해서 그러나 보다”라고 넘겼다.
애를 재워놓고, 싱크대 앞에 서 있었는데
설거지거리를 한참 쳐다보고 있으면서도
내가 그릇을 들고 있다는 감각이 없는 거다.
손은 움직이고 있는데
마음이랑 머리가 뒤에 남아 있는 느낌.
마치 화면은 재생되고 있는데
재생 버튼을 누른 사람은 자리를 비운 것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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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도 그런 하루였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이미 머릿속에 할 일 체크리스트가 줄을 섰다.
도시락, 등원 준비, 빨래, 병원 예약, 장보기,
돌봐야 할 사람들 이름이 줄줄이 떠오르고
내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다.
“괜찮아, 원래 엄마는 다 그렇게 사는 거지 뭐.”
입으로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머릿속에서는 조용히 하나씩 전구가 꺼지는 소리가 났다.
딸칵. 딸깍. 딱.
⸻
이상하다는 걸 본격적으로 느낀 건
점심이 지나갈 무렵이었다.
분명히 밥을 먹었는데
내가 뭘 먹었는지 기억이 안 났다.
“아까 뭐 먹었지… 김이었나, 계란이었나…”
주방을 둘러봐도 흔적이 없다.
설거지는 다 해놨으니까 당연한 건데
그 순간엔 그 단순한 인과조차 연결이 안 됐다.
배는 약간 든든한데
마음은 공복 상태.
몸은 ‘섭취 완료’라고 말하는데
뇌는 ‘기억 없음’이라고 뜨는 상황.
내 안에서 신호가 서로 다른 걸 보면서
아, 뭔가 회로가 꼬였구나.
그때 처음, 막연한 불안이 올라왔다.
⸻
전류가 처음 깜빡였던 순간은
정말 사소한 장면에서 찾아왔다.
휴대폰 알림이 울렸다.
학부모 단톡방. 학교 공지.
“오늘까지 제출”…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는데
문장을 세 번, 네 번 다시 읽어도
내용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늘까지’가 오늘이라는 건 알겠는데
그래서 지금 뭘 해야 하는지 연결이 안 되는 것이다.
프린트? 동의서? 준비물?
글자는 또렷한데, 의미가 안 붙는다.
마치 콘센트 앞에 플러그를 들고 서 있는데
어느 구멍에 꽂아야 할지 모르는 상태.
“아… 나 왜 이러지…”
그때부터였다.
내 머릿속의 전구가 한 번씩 깜빡이기 시작한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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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의 나는
적어도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면
원인을 추적하는 타입이었다.
잠이 부족해서 그런가?
밥을 제대로 안 먹었나?
요즘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나?
그런데 그 시기의 나는
이유를 찾는 생각조차 버거웠다.
그냥 “이상하다”에서 멈췄다.
그리고 그다음엔
“내가 원래 좀 이상하니까…”로 대충 봉합했다.
이유를 찾기에는,
머리에 남아 있는 전압이 너무 낮았다.
⸻
그때의 나를 돌아보면
겉으로는 멀쩡했다.
웃으라고 하면 웃을 수 있었고
필요한 역할은 어떻게든 수행했다.
밥도 하고, 빨래도 널고,
단톡방에 이모티콘도 찍었다.
그런데 작은 틈마다
검은 화면이 툭툭 끼어들었다.
분명 방금까지 애랑 웃고 있었는데
애가 방을 나가는 순간, 표정이 꺼졌다.
스위치를 누른 적이 없는데
‘딱’ 하고 불이 나가는 느낌.
⸻
가장 무서웠던 건
감정이 아니라 ‘공백’이었다.
슬프거나 화나는 건 그래도 익숙했다.
그건 적어도 살아 있는 반응이었다.
그런데 그때의 나는
기분이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아니고
그냥… 비어 있었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채
해야 할 행동만 겨우 굴리는 느낌.
눈앞의 장면들이
마치 다른 사람 인생을 TV로 구경하는 것처럼
희미하게, 거리감 있게 보였다.
“이 장면의 주인공이 나라는 증거가 뭐지?”
이렇게까지 생각이 튀어나오는 날이면
스스로도 소름이 돋았다.
⸻
나중에서야 알게 됐다.
그게 바로
‘전류가 깜빡이는 순간’이었다는 걸.
뇌라는 회로에 과부하가 걸리면
그냥 “조금 피곤한 날”로만 끝나지 않는다는 걸.
한 번, 두 번
짧게 깜빡이던 불안정한 불빛은
점점 더 자주, 더 길게 꺼졌다.
“왜 이렇게 멍해?”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방금 무슨 생각하려고 했지?”
이 질문들이 하루에 몇 번씩 올라올 때쯤
나는 비로소 인정해야 했다.
아, 이건 단순한 기분 문제가 아니구나.
진짜로, 회로 어딘가에서
전압이 떨어지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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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 보면
그날 싱크대 앞에서 멈춰 있던 내가
이 연재를 시작하기 위한 첫 장면이었는지도 모른다.
설거지거리를 멍하니 쳐다보던 그 순간,
나는 내 인생을 처음으로
‘외부 관찰자’ 시점으로 보기 시작했다.
“지금 이 사람, 좀 위험해 보이는데?”
“저렇게 계속 버티다간
어느 날, 진짜로 툭 끊어지겠는데?”
나를 동정하는 것도, 비난하는 것도 아닌
그저 상황을 분석하는 목소리가
아주 작게, 머릿속에서 말을 걸었다.
그게 이 시리즈의 시작이었다.
뇌 전압과 감정 회로를
차분히 다시 들여다보게 된, 첫 깜빡임.
⸻
그때는 몰랐다.
이 깜빡임이
앞으로의 몇 년을 통째로 흔들어놓을 거라는 걸.
기억이 뚝뚝 끊기고,
감정이 뒤늦게 밀려오고,
인간관계의 패턴까지 다 드러나게 되리라는 걸.
그냥 “내가 좀 이상해졌다” 정도로만 생각하며
대충 봉합하던 시기를 지나
이제 나는 그때의 나를
하나의 ‘증상’이 아니라
하나의 ‘신호’로 다시 읽어보려 한다.
전류가 처음 깜빡였던 날.
그건 모든 게 무너지는 시작이 아니라,
사실은 “이 회로, 점검이 필요합니다”라고 알려주던
경고등이었다.
이제 겨우, 그 경고의 의미를 이해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