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진다는 증거

2화. 잃어버린 볼트 — 뇌가 흐릿해진 시간들

by 담윤



전류가 깜빡이던 날들은

곧 흐릿함으로 이어졌다.


머릿속에 연무가 낀 것처럼

생각은 분명 떠오르는데

손에 쥐려 하면 사라지는 꿈 조각 같았다.


그 당시의 나는

생각이 없었던 게 아니라

생각을 붙잡을 수 없었다.


문장이 다 만들어지기 전에 증발하고,

해야 할 일은 떠오르기만 하고 실행되지 않았다.

바람에 불려가는 메모지처럼.



흐릿함은 특히 감정과 기억 사이에서 심했다.


예를 들어 유치원 뒤뜰에서

큰 아들의 웃는 얼굴을 보며 ‘따뜻하다’고 느꼈던 순간이 있었다.


하지만 10분 후에

그 장면을 다시 떠올리려 하면

색이 빠져 있었다.


마치 GIF의 첫 프레임만 남고

움직임과 온기가 사라진 것처럼.


“분명 좋았는데… 왜 그 감정이 기억이 안 나지?”


뇌는 있었던 일을 알고 있는데

마음은 열람 권한이 없는 듯한 상태.


기억 폴더는 존재하는데

비밀번호를 까먹은 느낌이라고 할까.



그보다 더 힘들었던 건

감정과 생각의 시간차였다.


상황은 지나가고 나서야

느낌이 뒤늦게 밀려왔다.


아이가 넘어져서 울던 순간엔

그냥 멍했다.


엄마라면 “괜찮아?”가 먼저 나와야 할 텐데

나는 한 beats 늦었다.


그리고 아이가 울음을 멈춘 뒤

괜히 가슴이 저릿했다.


이게 뭐지?

왜 타이밍이 항상 한 박자 늦지?


마치 신경다발 중 일부가

연결되지 않은 회선처럼.



이 흐릿함은 관계에서도 나타났다.


사람 이야기를 듣고 있을 때

내용은 들리는데 의미가 안 따라왔다.


음성만 흘러들어오고

자막이 사라진 드라마 같았다.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했는데

그 말이 나한테 어떤 감정으로 닿았는지는 남지 않았다.


나는 상대의 의도를 읽는 능력을 잃었고

대화의 맥락을 반복해서 놓쳤다.


그래서 더 웃고, 더 맞장구치며

겉을 매끈하게 유지하려 애썼다.


흐릿한 건 티 나지 않도록.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이 있었다.


마트 계산대 앞, 장바구니는 가득.

계산은 다 했고, 영수증을 건네받았다.


그런데 내가 계산한 건지

지금 계산하려는 건지

순간 구분이 되지 않았다.


“제가 결제했나요…?”


점원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방금 하셨어요.”


나는 멋쩍게 웃으며

“죄송해요, 요즘 정신이 없네요.”라고 넘겼다.


하지만 속으로는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얼마 전의 나는

이런 실수를 하지 않았다.


정확히 계산하고, 가격 비교하고,

심지어 할인 혜택도 외워 다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방금 끝낸 행동 하나조차 기억에 남지 않았다.


뇌의 RAM 용량이 줄어든 기분.

데이터는 계속 쌓이는데 저장이 안 되는.



가끔은

조금 더 심한 순간도 있었다.


베란다에서 빨래를 개고 있었는데

갑자기 문득, 내가 왜 서 있는지 기억이 없었다.


바구니는 손에 들려 있고

수건은 접혀 있는데

행동과 의도가 끊어진다.


‘세탁을 널러 나왔던가?’

‘아니면 걷어서 개던 중이었나?’


둘 다 맞는 말 같은데

둘 다 아닌 말 같았다.


그 순간의 나는

목적 없는 NPC 같이 느껴졌다.


프로그래밍된 행동만 반복하는 캐릭터.

의지가 아니라 스크립트로 움직이는 사람.


이건 내가 아는 ‘나’가 아니었다.



흐릿함은 두려움이 아니었다.

두려움조차 느껴지지 않을 만큼

감정 회로가 미세하게 꺼져 있었으니까.


가장 정확한 표현은 이거였다.


“나는 살아 있는데

살고 있는 느낌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더 많이 잊었다.


웃을 일도 흘러가고,

기분 좋은 기억도 희미해지고,

아이의 작은 성장 순간조차

원본 파일 대신 저해상도 이미지처럼 남았다.


나중에 사진을 보면

“아 그때 좋았지”라고 말할 수는 있었지만

그 따뜻했던 온도가 다시는 불러와지지 않았다.


뇌에 저장은 되었지만

플레이가 되지 않는 기록.


볼트가 떨어진 기억은

빛을 잃은 장면처럼 남았다.



흐릿함 속에서도

나는 계속 살아갔다.

밥하고, 애 키우고, 숨 쉬고.


겉으로 보기엔

어제의 나와 다를 게 없는 사람.


하지만 누구도 몰랐다.


나는 이미

몇 개의 회선을 잃어버린 채

불 완전히 꺼지지 않게

희미한 전압으로 버티고 있었다는 걸.


그리고 그 시절이 길어질수록

나는 점점 더

나라는 사람의 원형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회로 일부가 끊긴 상태로

버티는 법을 배워버린 것처럼.



이제서야 안다.


그 흐릿함은 기능 저하가 아니라

몸의 경고였다는 걸.


뇌가 보내는 적색 신호.

“지금 속도를 늦추지 않으면

우린 더 크게 꺼질 거야.”


나는 그 사인을 무시했고

더 큰 정전이 찾아오기 전에

겨우 멈춰 섰다.


그리고 그 멈춤이

다음 챕터를 향한 첫 브레이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