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진다는 증거

3화. 생각은 깊었지만 금방 지쳤던 이유

by 담윤

흐릿한 시기를 지나며 나는 자꾸 착각했다.

“생각이 없어졌다”가 아니라

생각이 너무 많아서 감당이 안 된 상태였다는 걸

한참 후에야 이해했다.


그 당시의 나는

잡념이 없는 게 아니라

잡념이 끊기지 않았다.


머릿속에서는

지진계처럼 미세한 감정의 떨림까지 전부 감지되고 있었다.

누가 한 말의 억양, 방 안의 공기 온도,

아이가 낸 아주 작은 한숨 소리까지.


모든 신호가 동시에 입력되니

처리를 끝내기도 전에 새로운 자극이 밀려왔다.


그러니까 생각이 깊은 게 아니라,

처리를 할 시간이 없었다.



머릿속에 스위치가 너무 많이 켜져 있었다


그 시절의 나는 하루 종일

마치 백 탭이 열린 컴퓨터 같았다.

• 아이 발달 상황 분석 탭

• 남편의 피곤함 파악 탭

• 시어머니의 감정선 해석 탭

• 단톡방 맥락 유지 탭

• 내 상태 확인 탭(가끔 렉)


이 모든 창이 동시에 떠 있었고

나는 그중 아무것도 제대로 닫지 못했다.


조금만 생각하면 깊어지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집중 에너지가 분산되어 있었다.


깊어 보였던 건

한 문제에 오래 머물러서가 아니라

한 번에 너무 많은 문제를 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옅은 실 여러 개를 동시에 잡고 있으니

어떤 실도 끝까지 당겨지지 못하는 상태.



생각은 불꽃같았지만 금방 탔다


머릿속에서 아이디어는 분명 잘 떠올랐다.

글도 잘 썼고, 대화도 통했고,

사람들의 고민도 기가 막히게 읽어냈다.


그런데 문제는 지속 시간이었다.


좋은 생각이 떠오른 순간엔

정말 전광석화처럼 날카로웠다.


하지만 20분만 지나도

그 생각은 흐릿해졌다.


어느 지점부터 집중력이 뚝하고 꺼졌다.

마치 무선 이어폰 배터리가 10% 남았을 때처럼.


음질은 그대로인데

갑자기 “삐” 하고 경고음이 들어오는 느낌.


깊은 사고가 아니라

짧은 과열과 빠른 소진이었다.


머리의 발열은 금방 일어나는데

냉각 장치는 느렸다.



생각을 유지하려면 전압이 필요하다


나중에 깨달았다.


생각 자체는 연료가 아니라

연료를 쓰는 소비 행동이란 걸.


생각이 깊어진다는 건

곧 뇌의 전력을 많이 쓴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그 당시의 나는

전압이 낮은 상태였기 때문에

집중 한 번 = 고갈 한 번이었다.


몰입 10분 과부하

사고 30분 방전


그래서 나는 늘

반짝하고 끝나는 사고만 남겼다.


좋은 문장이 스쳐가도 붙잡지 못했고

통찰이 떠올라도 기록할 힘이 없었다.


깊은 사고의 문제는

깊음이 아니라 유지였다.


깊어질수록 더 많은 볼트를 요구하는데

내 뇌엔 그만큼의 전류가 남아 있지 않았다.



‘나’라는 사람도 금방 지쳤다


생각이 빨리 타버리는 사람은

감정도 금방 타버린다.


남편의 말 한 줄에도 의미를 읽어내고

아이의 표정 변화를 깨알같이 느끼고

누군가의 말투 속 감정선을 스캔하면서도


저녁이 되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말을 듣는 중에도

“응응”이라는 반응만 자동으로 남고

내 감정은 뒤로 빠졌다.


사람들이 말하던

“네가 예전보다 조용해진 것 같다”는 말은

사실 상처가 아니라 사실이었다.


나는 말이 없어진 게 아니라

말을 운영할 전력이 없어진 것이었다.


나는 나를 유지할 에너지를 잃고 있었다.



생각은 살아 있었지만, 기름이 없었다


그때의 나를 떠올리면

유독 한 장면이 스친다.


머릿속은 번쩍이는데

몸과 감정이 말라 있었다.


마치 번개가 떨어지고 있지만

땅은 메마른 상태.


생각은 태풍처럼 몰아치는데

그것을 담을 바다가 없었다.


그래서 모든 사고는

흙바닥에 불꽃 떨어지듯

순간적으로 타오르고 끝났다.


저장되지 않고, 연결되지 않고,

다음 사고로 이어지지 않았다.


고로 지쳤다.

고로 텅 비었다.

그러나 멈추진 못했다.


형태만 남은 불꽃처럼.



지금의 나는 그 이유를 다시 정의한다.


나는 멍청해진 게 아니었다.

무능해진 것도 아니었다.


나는 볼트를 잃고 싸우고 있었던 것이었다.


수많은 자극과 생각을 처리하느라

뇌는 언제나 풀 부하 상태였고

그 모든 연산이 나를 닳게 했다.


생각은 살아 있었지만

유지할 에너지가 없었기 때문에

깊지만 오래가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던 것.


그건 나의 실패가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