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진다는 증거

20화. 문혁진 — 자극은 주지만 에너지를 태우는 타입

by 담윤





문혁진은

윤태하와 마찬가지로

남편의 오래된 친구이고,

앞으로도 계속 같은 자리에 있을 사람이다.


그래서 이 관계는

정리의 대상이 아니라

관리의 대상에 가깝다.



문혁진이 있는 자리에서는

정보량이 많아진다.


말의 속도,

주제 전환,

농담과 반응.


대화는 끊기지 않고

분위기는 계속 유지된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내가 계속 처리해야 할 입력값이 많아진다는 점이다.



문혁진과 함께 있으면

나는 나도 모르게

집중을 분산시킨다.


한 가지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동시에

다음 흐름을 예측하고,

중간에 끊길 포인트를 계산하고,

지금 말이 어디로 가는지 계속 추적한다.


이건 감정이 아니라

인지적 작업이다.


머리가 바빠진다.



윤태하와의 대화가

생각을 정리하게 만들었다면,

문혁진과의 대화는

생각을 계속 돌게 만든다.


대화를 마치고 나서

특정 감정이 남는 건 아니다.


다만

머리가 쉽게 쉬지 않는다.


정보 처리가 끝나지 않은 상태로

집에 돌아오는 느낌.



중요한 건

문혁진이 불편하거나

선 넘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사회적으로 아주 무난하고,

분위기를 잘 살리는 타입이다.


그래서 더 헷갈렸다.


왜 나는 이 자리에 오래 있으면 피곤해질까.



이제는 안다.


그 이유는

이 사람이 요구하는 게

감정이나 친밀감이 아니라

지속적인 인지 참여이기 때문이다.


이 관계에서는

가만히 있어도 되는 순간이 적다.


침묵이 생기기보다는

다음 말이 바로 이어진다.


뇌는 쉬지 못한다.



생활권 안에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이 차이가 아주 중요하다.


나쁜 사람인가? 아니다.

불편한 사람인가? 아니다.


다만

내 신경계가 오래 버티기 힘든 리듬이다.


이건 성향의 문제이지

호감이나 거리의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문혁진을 대할 때

나를 바꾸지 않는다.


대신

시간을 짧게 잡는다.


집중력이 남아 있을 때까지만,

머리가 과부하 되기 전까지만.


이건 거리두기가 아니라

인지 자원 관리다.



윤태하는

생각을 느리게 정리해주고,

문혁진은

생각을 빠르게 순환시킨다.


둘 다 필요하지만

같은 상태에서

같은 양으로 필요하지는 않다.


그래서 나는

이 관계들을

좋고 나쁨으로 나누지 않는다.


그저

내 상태에 맞게 배치한다.



문혁진은

내 삶을 어지럽히지 않는다.


다만

오래 접속하면

내 에너지를 더 빨리 소모시킨다.


그 사실을 인정하자

이 관계는

훨씬 편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