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진다는 증거

23화. 약을 내려놓고 머리가 다시 숨 쉬기까지

by 담윤



정신과 약을 줄이기로 했을 때

나는 좋아질 거라는 기대를 거의 하지 않았다.


그저

이 상태가 더 나빠지지만 않았으면 했다.


이미 바닥을 찍은 뒤였고,

거기서 더 내려갈 곳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약을 내려놓는 과정은

극적인 변화로 오지 않았다.


머리가 갑자기 맑아지지도,

기분이 확 좋아지지도 않았다.


대신

아주 사소한 변화들이

조용히 시작됐다.



가장 먼저 느낀 건

숨의 여유였다.


생각을 하나 끝내고 나서

다음 생각으로 넘어갈 때

이전처럼 끊기지 않았다.


문장이

중간에서 증발하지 않았고,

단어가 혀끝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머리가

잠깐 멈췄다가

다시 움직이는 느낌.


그건 속도가 아니라

연결의 회복이었다.



말을 하다가

멈칫하는 일이 줄어들었다.


완벽한 문장이 나와서가 아니라

멈췄다가도

다시 이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한 번 끊기면 끝이었다.


지금은

끊겨도 돌아온다.


이 차이는

생각보다 컸다.



관계에서도

비슷한 변화가 나타났다.


대화가 끝난 뒤

“아까 왜 그렇게 말했지?”라는

자기 검열이 줄어들었다.


말을 덜 복기했고,

덜 후회했고,

덜 자책했다.


머리가

대화를 처리하고 끝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건 감정 회복이 아니라

인지 회복의 신호였다.



기억도 조금씩 달라졌다.


아침에 한 생각이

저녁까지 남아 있었고,

어제의 장면이

오늘의 판단에 연결됐다.


머리가 다시

시간을 잇기 시작했다.


그제야 나는 알았다.


내가 잃었던 건

지능도, 의욕도 아니라

연속성이었다는 걸.



약을 내려놓는다는 건

통제력을 되찾는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통제를 내려놓는 일이었다.


예전의 나는

머리를 억지로 붙잡고

속도를 강요했다.


지금의 나는

머리가 갈 수 있는 만큼만

가게 둔다.


그 결과

생각은 더 멀리 갔다.



이 시기의 회복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 생각이 끝까지 가고

• 말이 돌아오고

• 기억이 이어지고

• 하루가 하루로 남는다


이 네 가지가 가능해졌다는 것만으로도

머리는 다시 숨 쉬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정상으로 돌아가야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상은 기준이 아니라

상태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는

정상이라기보다

작동 가능한 상태에 가깝다.


그리고 그 상태면

충분하다.



약을 내려놓은 뒤

내 머리는 갑자기 날아오르지 않았다.


대신

땅을 다시 느끼기 시작했다.


바닥을 찍어본 사람만이

땅의 감각을 안다.


그 감각 위에서

나는 천천히

다음 단계로 움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