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제는 대게 악의로 시작하지 않는다.
통제는 대게 악의로 시작하지 않는다.
사람을 지배하고 싶어서,
상대를 조종하고 싶어서
시작되는 경우는 생각보다 드물다.
통제는
대부분 효율의 이름으로 등장한다.
“이렇게 하면 일이 빨라져.”
“굳이 다 말할 필요는 없잖아.”
“상황이 복잡해지니까
내가 정리할게.”
이 말들에는
폭력도 없고,
위협도 없고,
심지어 선의처럼 보이는 부분도 있다.
그래서 통제는
거부하기 어렵다.
윤리를 버린 삶을 상상하면서
가장 현실적으로 느껴졌던 장면도
바로 이 지점이었다.
누군가를 통제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하지 않아도,
상황을 관리하는 사람이 되다 보면
통제는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통제가 잘 작동하는 이유는
그 방식이 단순하기 때문이다.
모든 정보를 공유하지 않는다.
결정권을 한쪽에 모은다.
상대가 질문할 틈을 줄인다.
이렇게만 해도
상황은 훨씬 안정된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렇다.
통제는
혼란을 줄여준다.
갈등을 예방해준다.
의견 충돌을 미리 제거해준다.
그래서 통제는
능력처럼 보인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통제가 한 번 작동하면,
다음 상황에서도
같은 방식을 쓰고 싶어진다.
왜냐하면
이미 효과를 봤기 때문이다.
사람은
효과가 검증된 방법을
다시 사용한다.
윤리를 버린 선택과 마찬가지로,
통제 역시
반복을 통해 학습된다.
이때부터
관계는 조금씩 바뀐다.
대화는
설명이 아니라 전달이 되고,
의견은
검토 대상이 아니라 변수로 바뀐다.
상대는
같이 판단하는 사람이 아니라,
관리해야 할 요소가 된다.
통제는
상대를 약하게 만들지 않는다.
대신
상대의 선택 범위를 줄인다.
이 과정에서
가장 먼저 사라지는 건
질문이다.
“왜?”
“정말 그래?”
“다른 방법은 없어?”
이 질문들이 사라지면
통제는 더 잘 작동한다.
그래서 통제는
조용하다.
소리를 높일 필요가 없고,
위협할 이유도 없다.
상대가 질문하지 않으면
통제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나는 이 지점에서
아주 불편한 생각을 했다.
이 방식은
너무 잘 작동한다는 것.
그래서
윤리를 버린 삶에서
통제는 선택이 아니라
결과에 가깝다.
효율을 중시하는 순간,
통제는
가장 빠른 해결책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한 번
통제의 위치에 서게 되면,
그 자리를 내려오는 건
생각보다 어렵다.
왜냐하면
그 자리를 내려오는 순간,
다시 설명해야 하고,
다시 공유해야 하고,
다시 질문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통제는
편함을 준다.
하지만 그 편함은
항상 같은 방향을 요구한다.
더 적은 공유,
더 빠른 결정,
더 많은 관리.
이 지점에서
나는 다시 아이들을 떠올렸다.
통제가 익숙해진 내가
아이 앞에서
어떤 말을 하게 될지를.
“엄마 말 들어.”
“그냥 그렇게 하면 돼.”
“설명할 시간 없어.”
이 말들이
너무 자연스럽게
나올 것 같았다.
통제는
상대를 억압하기 전에,
설명을 귀찮게 만든다.
그리고 그 순간,
윤리는 다시
불리한 자리에 서게 된다.
윤리는
항상 설명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 회차에서
통제를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통제는
능력일 수도 있고,
상황에 따라
필요한 선택일 수도 있다.
다만 이 말은
정직하게 남기고 싶다.
통제는
너무 잘 작동해서
한 번 익숙해지면
다른 방식을
떠올리기 어려워진다.
그래서 다음 질문은
이렇게 이어진다.
윤리를 버린 선택이
왜 이렇게 자연스럽게
숨김과 거짓말로
이어지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