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보기라는 말이 부담이 되었던 이유
11화
이 질문을 처음 떠올렸을 때,
나는 스스로에게 조금 당황했다.
‘윤리적인 엄마’라는 말은
보통 의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좋은 말이고,
안전한 말이고,
반대하기 어려운 말이다.
그런데 나는
그 말이
점점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아이 앞에서
항상 옳은 선택을 해야 할 것 같고,
항상 설명 가능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 같고,
항상 흔들리지 않는 기준을
보여줘야 할 것 같은 느낌.
나는 그 질문이
착함에 대한 부담이라기보다,
역할에 대한 부담처럼 느껴졌다.
‘윤리적인 엄마’라는 말 속에는
늘 ‘본보기’라는 단어가 따라붙는다.
아이에게 보여줘야 할 삶,
아이에게 가르쳐야 할 태도.
그런데 나는
아이에게
정답을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아니었다.
아이에게
“이렇게 살아야 해”라고 말하는 대신,
“이건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어”라고
말해주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 질문은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나는 꼭
윤리적인 엄마여야 할까,
아니면
아이와 같은 기준으로
세상을 설명할 수 있는 엄마면 될까.
이 두 가지는
겹치는 부분도 있지만,
완전히 같은 말은 아니다.
윤리적인 엄마라는 말은
종종
흔들리지 않는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
늘 옳은 쪽을 알고 있고,
늘 선택을 잘 해내는 사람.
하지만 나는
아이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사람보다,
흔들리는 이유를
숨기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아이에게
“엄마는 왜 이 선택을 했어?”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답을 피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
그리고 그 답이
아이에게도,
아이의 친구에게도,
다른 어른에게도
같은 말로 설명될 수 있는 사람.
그 지점에서
윤리는
도덕적 우월의 문제가 아니라,
언어의 일관성 문제가 되었다.
아이에게만 통하는 말,
집 안에서만 가능한 설명,
밖에서는 숨겨야 하는 선택.
그런 것들을
아이에게 남기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아이에게
“엄마는 완벽하지 않아”라고 말할 수는 있어도,
“엄마가 한 이 선택은
너는 이해하지 않아도 돼”라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윤리를
붙잡게 된 이유는
아이에게 본보기가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아이를
설명에서 제외시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윤리적인 엄마라는 말은
어쩌면
아이를 위한다는 말처럼 들리지만,
그 안에는
부모의 선택을
아이에게서 분리시키는 위험도 함께 들어 있다.
“어른의 세계는 달라.”
“사회는 원래 그래.”
“너는 아직 몰라도 돼.”
이 말들은
아이를 보호하는 말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아이를 사고에서 제외시키는 말이기도 하다.
나는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윤리를 선택한 게 아니다.
아이를
침묵 속에 두지 않기 위해
그 선택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아직도 단순하지 않다.
나는
꼭 윤리적인 엄마여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아이에게
다른 기준을 가르치지 않아도 되는 엄마,
같은 언어로
같은 선택을 설명할 수 있는 엄마로
남고 싶을 뿐이다.
다음 회차에서는
이 질문으로 이어가려 한다.
윤리적이지 않은 돈을 벌었다고 해서,
그 사실은
정말로 아이에게 숨겨야 할 일이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