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진다는 증거

6화 “왜 그땐 몰랐을까?” — 회로 설명이 없던 마음

by 담윤

돌이켜보면,

그 시절의 내가 가장 많이 반복한 문장은 이것이었다.


“왜 그땐 몰랐을까?”


몸은 무너지고 있었는데도

나는 이유를 몰랐고,

말할 수도 없었다.


밤마다 머리맡에 엎드려 누워

한 장면씩 되돌려 보듯 하루를 복기해도

결론은 항상 같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가 이상하다.”

원인을 찾지 못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문장.


그리고 그 문장 안에는

나라는 존재를 향한 오해가 깊게 박혀 있었다.



나를 이해할 설명서가 없었다


지금의 나는 명확히 안다.


당시에도 증상은 존재했다.

감정은 먼저 뛰었고,

생각은 금방 고갈됐고,

기억은 끊어지고,

언어는 늦게 도착했다.


문제는 그 현상을 해석할 언어가 없었다는 것이다.


뇌가 보내던 신호는 분명했다.

그런데 나는 그 신호를

“피곤”

“육아 스트레스”

“내가 예민해서” 로 잘못 번역했다.


전압이 떨어지고 있었는데

나는 그걸 ‘내 성격 탓’으로 결론 내렸다.


설명이 없으면

원인은 항상 “나”가 된다.

그렇게 스스로를 탓하며 더 낮은 전압으로 굴렀다.



장면 하나 — 설명이 없던 하루


어느 날은 이런 일이 있었다.


첫째가 가져온 공책을 펼쳤다.

숙제를 확인해야 했는데

글씨가 눈앞에 들어오는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단어는 읽히는데 뜻이 안 붙었다.

한 줄 읽고 나면 앞 문장의 내용이 지워졌다.

또 읽어도, 또 지워졌다.


그때의 나는

“요즘 집중이 안 되네.”

“엄마라면 이 정도는 버텨야지.”

이렇게 자책하며 공책을 덮었다.


지금 돌아보면 명확하다.


그건 주의력 전류의 소진이었다.

생각이 사라진 게 아니라

생각을 유지할 전압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몰랐다.

언어가 없으니 설명도 없었고

설명이 없으니 스스로를 비난했다.



장면 둘 — 슬픔이 갑자기 끼어들던 순간


마트에서 장을 보다가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진 날이 있다.


아무 이유도 없었다.

카트엔 우유와 과일, 식빵뿐인데

갑자기 둘째 생각이 났다.


둘째가 남긴 아주 작은 체온,

병원 창 사이로 스며들던 10월의 냄새,

수액 줄을 따라 내려오던 차가움.


슬픔이 통보 없이 밀려들었고

나는 멈춰 서서 숨을 고르며

사람들 시선을 피해 과자 코너 뒤로 숨었다.


그때도 이해하지 못했다.


“왜 갑자기 이 생각이 나지?”

“왜 지금 울컥하지?”


지금은 말할 수 있다.


그것은 감정 회로의 잔여전류가 터진 순간이었다.

처리되지 못한 사랑과 상실이

아무 경고 없이 재생된 것.


설명이 없으면 고통은 공포가 된다.

그 시절의 나는 이유를 모른 채

감정의 파도를 온몸으로 받아냈다.



회로 이상은 ‘성격’이 아니다


그때의 나는

내가 약하다고 생각했다.

참을성이 없고, 예민하고, 불안정해졌다고.


그러나 이제는 안다.


그건 성격의 붕괴가 아니라

회로의 오작동이었다.

• 감정 신호가 과도하게 입력되었고

• 사고 유지 전압이 부족했고

• 기억 접근 회로가 느리게 동작했고


그 모든 현상은

‘이유가 있었다.’


단지 그 언어를 몰랐을 뿐이었다.


설명 없이 무너지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고장으로 본다.


나는 그 시절, 나를 “고장 난 사람”이라고 믿었다.

지금 생각하면 가장 아픈 착각이다.



말로 알게 되니, 과거가 조금 줄었다


이제야 말할 수 있다.


그때의 나는

모르기 때문에 무너진 게 아니라

말할 언어가 없어서 헤맸던 사람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되자

그 시절의 날 미워하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묘하게 고맙다.


지도가 없는데도 걸어갔고

전압이 없는데도 살아냈고

언어가 없는데도 버텼던 그 사람.


그 무지의 시절이 있었기에

나는 지금 이해의 자리까지 왔다.


unknown(미지)은 failure(실패)가 아니라

process(과정)이라는 걸

이제야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