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진다는 증거

5화. 과거와 현재가 동시에 보이기 시작했을 때

by 담윤



감정이 언어보다 먼저 뛰던 시간을 지나고 나니

어느 날부터인가 과거와 현재가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지금 경험 중인 장면에

몇 년 전의 기억이 그대로 덧입혀졌다.


아이의 손을 잡고 걷는데

문득, 잃어버린 둘째의 체온이 겹쳐져 떠올랐다.


지금의 셋째 아이가 웃는 얼굴 뒤로

인큐베이터에 누워 있던 둘째 얼굴이

겹겹이 보였다.


하나는 살아 있는 기록,

하나는 마음속에 갇힌 필름.


두 개의 시간이 동시에 재생될 때

나는 어느 쪽이 현재인지 잠시 헷갈렸다.


너무 선명해서 잊은 게 아니다.

너무 아파서 저장된 것이다.



뇌가 기억을 꺼내 쓰는 방식


그때의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왜 평범한 일상이 계속 과거를 불러오는지.


이후에야 알았다.

감정이 회복되기 시작하면, 기억도 함께 열린다는 사실.


기억은 저장된 사건이 아니라

저장된 감정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감정이 다시 켜질 때

기억이 함께 돌아오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나는 그때 몰랐지만

내 뇌는 조용히 말하고 있었다.


“지금 감당할 준비가 되었으니

꺼내도 괜찮겠니?”



현재의 장면이 옛 기억을 비추던 순간


예를 들어, 이런 장면이 있었다.


큰 아들이 초등학교 첫 숙제를 가져왔던 날.

내가 “잘했어”라고 칭찬하는데

갑자기 2019년의 병원 복도가 떠올랐다.


둘째의 꽤 작은 손이,

수액 줄을 타고 내려오던 차가움이,

그 복도 특유의 소독약 냄새가.


첫째의 현재 웃음 뒤에

둘째의 지난 시간이 따라붙었다.


나는 웃으면서도

속으로는 눈물이 찼다.


한 아이는 살아 성장하고 있고

한 아이는 시간 속에 멈춰 있다는 사실을

내 뇌가 동시에 보여준 것이다.


고통이 아니라

손실의 존재를 인정하는 재생.


그건 잊지 않겠다는 증거였고,

이제 마침내 볼 수 있게 된 용기였다.



과거 회로가 현재 회로에 접속되다


처음엔 괴이했다.

왜 지금 갑자기 그 기억이 나타나는 걸까?


하지만 곧 이해했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처음으로 대화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는 걸.


감정이 언어로 번역되면

기억도 말할 수 있는 형태로 바뀐다.


그전까지 기억은

가슴 한쪽에서 얼음처럼 뭉쳐 있었다.


말로 꺼내지 못한 감정은

언젠가 반드시 되돌아온다.

단지 해석 가능한 형태로 찾아올 때까지 기다릴 뿐.


나는 마침내

기억을 당한 사람에서

기억을 다루는 사람이 되기 시작했다.


그 변화는 미세했지만 확실했다.



시간이 겹치는 뇌의 방식


하루는 저녁에 설거지를 하다 멈칫했다.

물 흐르는 소리 사이로

아이 울음 같은 환청이 들렸다.


그 소리는 과거였다.

하지만 내 몸이 반응한 건 지금이었다.


과거의 소리를 현재에서 인식하는 순간,

난 이해했다.


뇌는 기억을 ‘지금처럼’ 재생한다.

어제 있었던 일처럼.

방금 겪은 일처럼.


그래서 과거와 현재가 겹쳐 보이는 게 아니라

현재에 과거가 입혀지는 것이다.


뇌는 시간을 구분하지 않는다.

감정이 있는 순간은 모두 현재다.


그걸 알게 되자

나는 과거가 떠오르는 일이

더는 갑작스럽고 낯설지 않았다.


기억이 나타나는 건 괜찮아졌기 때문이었다.



회복은 망각이 아니라 공존이었다


사람들은 위로한다고 말한다.

“시간 지나면 괜찮아져.”


하지만 나는 이제 안다.

시간이 지나서 괜찮아지는 게 아니라

시간들이 서로 손을 잡기 시작할 때

비로소 숨이 쉬어진다는 걸.


과거를 떼어내는 게 아니라,

과거를 현재 옆에 둘 수 있게 된 시점.

그게 회복의 표시였다.


잃은 아이를 잊을 수는 없지만

그 아이의 존재가

다른 아이의 존재를 가리지 않게 될 때.


슬픔과 기쁨이 서로를 방해하지 않고

한 화면에 나란히 놓일 때.


나는 마침내

살아 있는 사람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