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리의 산행, 화왕산 억새밭

by 김근상

오랜만의 산행이었다. 꼬박 한 달 만에 ‘00 산악회’ 회원들과 함께 경남 창녕에 있는 화왕산의 품으로 향했다. 10월 중순, 아직은 단풍이 짙게 물들지는 않았지만, 푸른 기운 속에 붉은빛이 엷게 스미는 산의 풍경만으로도 가슴이 설렜다. 특히 화왕산 정상의 거대한 분화구, 그곳을 가득 채운 은빛 억새꽃이 만발했다는 소식은 이번 산행의 가장 큰 기대였다.

산 중턱쯤 올랐을까, 함께 걷던 동행인의 발걸음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숨을 고르는 횟수가 잦아지더니, 끝내 몸이 좋지 않다며 나에게 먼저 올라가라고 권유했다. "나는 여기서 되돌아 내려가야 할 것 같아요. 괜찮으니 먼저 올라가요."

나도 모르게 '의리가 있지' 하는 생각이 마음속을 스쳤다. 함께 시작한 산행, 홀로 돌아서게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의 완강한 태도에 나는 일단 먼저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불안함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그의 안위를 걱정하며 500보 정도 올랐을까, 결국 걸음을 멈추고 전화를 걸었다.

"어디쯤이에요? 정말 괜찮아요?"

잠시 후 들려온 그의 목소리는 조금은 생기가 돌아 있었다. "챙겨온 김밥이랑 에너지바, 사탕 먹고 힘 얻어서 다시 올라가고 있어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를 기다리기로 했다. 다시 힘을 낸 그에게 끝까지 동행해 주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기다릴게요. 꼭 함께 정상까지 가요." 그는 연신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 순간, 산행의 목적이 정상 정복이 아닌, '함께 걷는 것' 자체에 있음을 깨달았다.

우리는 다른 일행들과는 한참 떨어져 천천히 발걸음을 맞추었다. 드디어 정상에 올라 드넓은 분화구와 은빛 억새의 물결을 감상했다. 가을 햇살 아래 반짝이는 억새는 고난을 이겨낸 우리를 축복하는 듯했다.

하지만 몸 상태를 고려하여, 기대했던 '배바위 코스'의 아찔한 암릉 구간은 아쉽지만 포기했다. 우리는 서문 방향으로 접어들어 ‘자하’ 계곡으로 하산하는 길을 택했다.

계곡을 따라 내려오는 길, 맑고 청량한 물소리가 귀를 즐겁게 했다. 굽이굽이 흐르는 계곡물은 바닥이 훤히 보일 정도로 깨끗했다. 피로가 몰려오던 찰나, 나는 잠시 멈춰 차가운 계곡물로 세수했다. 한순간에 땀과 피로가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산행 내내 걱정과 안도가 교차했지만, 결국 서로의 곁을 지키며 함께 마무리한 산행이었다. 가을 화왕산의 억새와 깨끗한 계곡물,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믿고 따라와 준 동행인과의 '의리'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25. 10.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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