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입지 않던 외투 호주머니에서 2만 원이 나왔다. 남편에게 호기롭게 1만 원을 건네주고
오랜만에 걸어서 지하철을 타리라 마음먹고 배낭을 메고 편한 신발을 신었다.
봄을 시샘하는 쌀쌀한 바람이 내 볼을 스치는 날. 떠나지 못한 겨울이 싫지는 않다.
거의 지하철 입구에 다다랐을 무렵 나의 눈에 들어온 것은 옷을 입은 도넛이다.
길 가에 위치한 초라한 상점인 탓인지 다른 베이커리와는 거리가 먼 아니 상상할 수 없는 도넛의 진열이다
개별 포장은커녕 비닐로 덮은 채 무더기로 쌓아 놓은 것이다.
무심히 가게를 지나쳐 걷다 얼핏 보이던 초로의 남성과 휴대폰에 몇 장의 카드와 함께 있는 10.000원이 떠올랐다.
다시 돌아가 들여다보니 풍물시장 안에나 있을법한 좌판엔 어릴 적 먹던 꽈배기, 찹쌀 도넛, 크로켓(크로켓), 이름도 잊고 있었던 앙꼬도넛 (팥 앙금)의 고소한 냄새가 오전 9시 10 분의 찬 공기를 데우고 있었다.
뿌연 비닐 문 사이로 바깥을 내다보던 사장님이 서둘러 나오며 반기신다.
도대체 몇 시부터 오늘을 준비하신 것일까.
본인의 말에 의하면 30년 동안 한 자리를 지키고 반죽하고 튀기는 세월을 도넛에 바친 것이다.
그분의 끈기와 삶의 태도를 짐작해 본다.
새벽부터 일어나 반죽하고 튀기며 한 여름의 그악한 더위와
칼바람 부는 겨울을 마주하고 견딘 수많은 기다림의 날들.
튀기며 떠오르던 도넛에서 무지개를 보았을까? 아니면 그에게 인생은 갈색 도넛의 빛일까.
우리가 흔히 인생살이 성공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부와 명예가 따르지 않았을지라도
그분은 나름의 자긍심을 갖고 계실 것만 같다.
대학가가 멀지 않은 이곳을 지나가며 얼마나 많은 어린 청춘들이 허기진 배를 채웠을까.
호주머니가 얄팍한 연인들은 달콤하고 따뜻한 도넛 같은 사랑을 나누기도 했으리라.
어쩌면 내 연배의 누군가는 막다른 골목길에 자리한 집의 대문을 밀던 옛 추억을 회상하며
종이봉투에 담기도 하였겠다.
카드도 꺼낼 필요가 없고 포인트 쌓겠다고 전번도 알려줄 필요 없이 단숨에 주고받는 결제의 그 간결함이 얼마나 나를 회복시키는 순간이던가.
1만 원의 행복은 코로나와 함께 사라진 것 같은데 나는 12개에 1만 원으로 손에 도넛을 쥐어 든다.
아직 따뜻한 도넛을 사들고 10명의 친구들을 만나 함께 나눌 찻잔에 어릴 그들의 미소와
오전에 12개의 도넛을 기쁘게 떠나보낸 사장님을 생각하며 지하철 4호선에 오른다.
오늘 오전의 걷기로 다가 온 1만 원의 행복이 감사한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