춥다
마음은 갈등.
폰에 저장된 418이란 숫자가 나를 머뭇거리게 한다. 어쩌자고 젤 맛있는 베이글을 사다 주겠다고 말을 했을까. 앞에 있는 4가 아니라면 얼마든지 기다릴 것 같다. 하지만 3시간 정도를 기다려야 한다는 길고 하얀 가운을 멋지게 차려입은 직원의 말에 난 적잖이 실망했다. 후회와 함께 갈등이 생긴다.
돌아갈까. 곁에 있는 젊은이들은 모두 짝수인데 난 홀로아리랑이다.
난 베이글을 좋아한다. Palm tree 아래서 바다를 마주하고 쓴 커피와 함께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인인 양 각종 치즈를 발라 먹었던 기억이 나의 젊음의 숲에 자리하고 있다
한때는
뉴욕의 한 복판에서 이른 아침 강아지와 때론 투견처럼 성난 얼굴의 검은 개를 데리고 와 두껍기도 한 주말판 타임스를 읽으며 차례를 기다리던 키 크고 얼굴이 맑은 여인. 선글라스가 기막히게 어울리는 그녀가 조금 부러웠다. 그녀의 안정된 삶이 내겐 없었기 때문이다.
역시나 맛집으로 유명세를 타는 곳은 인내를 필요로 하기에 30분 정도는 기본으로 줄을 서서 기다려야
문턱을 넘을 수 있던 그곳에서 난 누렇고 질긴 봉투에 베이글을 가득 담아 집으로 돌아와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과 함께 준비된 커피로 웃음 꽂을 피우곤 했다.
어느 날
베이글 위에 베이콘과 구운 양파와 토마토 위로 치즈와 마요네즈의 완벽한 구성의 맛을 본 후론 난 더 좋고 마음에 맞는 친구를 만난 듯했다.
예전 나를 행복하게 했던 단순한 치즈와 베이글의 단순한 조합의 그 맛과는 비교가 안 되는 진한 맛이 나를 감동시켰다.
굳이 시사를 이야기하고 북 리뷰를 할 필요 없이
편하게 날씨를 이야기하고 티브이의 미드 시리즈를 이야기할 수 있는 아침상을 받은 느낌이었다
달랑 밀가루와 커피라니~젊은 날 멋지고 있어 보이던 것들이 의미를 상실해 가는 까닭일까.
아니면 내 유전자 속에 흐르고 있는 반찬이 가득한 한상차림이 나를 멈추게 하는 것일까.
서울의 삶을 즐기면서 가끔 먹는 베이글은 내 청춘 속 추억의 맛을 지우지 못해 그립기도 했다.
어쩌다 비행기에 실려 내게 오면 난 은밀하고 조심스레 그님을 맞았다. 주말의 늦은 아침에 말이다.
동생이 전해준 요즘 핫 하다는 쪽파와 감자를 얹은 베이글의 쫀득거림이 내 미각을 깨웠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기도 하여
아침 시간을 내어 그곳을 찾은 날이 오늘이다.
주중이고 이른 시간이고 또 춥기도 하니 어려움 없이
여유 있게 마음껏 골라 나누기도 하고 냉동고에 집어넣으리라 생각했다.
마음 같아선 창경궁을 돌아 창덕궁을 지나가고 싶었지만 얇은 외투 탓에 버스를 탔다.
대충 짐작으로 찾아간 곳이 맞기는 했는데
상상과는 달리 이미 식당 안은 꽉 차있고
나의 전화번호를 찍은 후 나온 번호는 418.
앗 머피의 법칙이 이곳에서 나올 줄이야
갈등 갈등
나는 어쩌면 3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는 직원에게 비굴한 웃음으로 포장만 한다고 해봤지만 결코 통할 수 없는 진리.
인내심을 갖고 기다렸더니 바로 앞에서 sold out라고 했다는 가슴 무너지는 경험담을 듣기도 한지라 망설임의 시간이 길어졌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자니 번거롭고 조금은 억울하기도 했다.
잠시 차 한 잔 마시며 결정하리라 생각하다
다시 버스를 탔다.
혹여라도 세일을 하는가 백화점을 기웃거리다 보니 한 시간도 채 안되었다
어제의 시간은 넘 빨리 흐르더니 웬일인가 오늘은.
출출한 배를 채운다며 평소라면 앉을 일이 없는 혼자만을 위한 식탁에 앉아 소롱포 만두를 집으며 괜히 옆자리의 예쁜 처녀 눈치를 본다. 약속을 못 지키니 그녀도 좋아하는 만두를 대신 갖다 주리라 생각하면서도
수시로 확인하는 줄지 않는 기다림의 숫자는 나를 절망케 한다.
춥고 가슴 시린 오후 3시 17분 문자가 와 있었다.
대기손님은 차례가 되었으니 입장하시라고.
머피의 법칙. 베이글의 레슨. 먹방의 시대.
돌아와 나는 갈근탕을 따뜻하게 데워 마셨다.
그리고 평소보다 일찍 잠들었다.
그날 밤 나는 꿈속에서 맛있는 런던베이글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