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일어나 컴퓨터를 켠다. 어제 마치지 못한 작업이 있기 때문이다. 한쪽으로 밀어 놓았던 원고를 읽어보며 새로 만든 폴더를 채우고 있다. 새로운 방이 하나 생겼다. 나는 ‘시‘라고 쓰고 들여다본다. 낯설다.
조금 더 젊던 날, 어떤 이가 시가 좋아서 시만 생각하면 행복하다고 했다.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연세 지긋한 분이 행복을 꿈꾸는 것이 시를 통해서라니 의아했다. 당시 내겐 시는 어렵고 때로 지루했다.
시를 통한 행복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한 시인은 '양심에 털이 나니 시상이 흩어져 시를 쓸 수 없다'라고 말하며 시를 쓰려면 마음이 명경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생각건대 바람에 흩날리는 갈대와 같고, 욕심도 많고 타인에 대한 배려도 부족하며, 시기와 질투 또한 만만치 않은 내가 어찌 명경을 유지하겠는가? 그러니 단 한 줄의 진정한 시를 쓰기에도 역부족인 사람임을 고백한다
하지만 그다지 부끄럽지도 않으니 정말 양심에 문제가 있는가 보다.
또한 나는 진정한 시가 무엇인지? 왜 써야 하는지?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모른다고 말해야 맞다
폴 발레리는' 시의 첫 줄은 신이 주는 것'이라고 했다.
눈 내리는 한 겨울이 한없이 좋다. 어느 날 하늘에서 펑펑 폭죽처럼 내리는 눈을 보고 ‘아! 눈이다’라고 시작한다면 난 시의 첫 구절을 신의 축복으로 시작할 수 있는 것인가?
한 겨울 따스한 연탄불을 보고 타인에 대한 배려 없음을 반성하는 작가는 시인이다.
담쟁이를 보고 시를 쓰는 사람도 시인이다. 넘어지지 않을 곳에서 넘어질 때가 있다고 쓰는 이도 있다. 떨어져서도 향기로운 꽃잎 같은 사람을 희망하며 시를 쓴 사람도 안다. 시는 시인의 영혼으로 빚어낸 최상의 언어라고 한다.
최상을 생각하니 또 부담이 된다. 그냥 쓰면 안 되나? 내리는 눈을 보고 ‘아 눈이다’라고 쓰면 최상의 표현이 아니다. 한데 누구나 시인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그 누구나의 시인이 되어 시를 쓰기 전에 시인들의 작품을 읽어보았다. 소리 내어 읽어 보았다. 그리고 타인의 낭송을 들어 보았다. 어느 날 가슴으로 시가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학창 시절 배웠던 김소월의 “금잔디”가 생각났고 윤동주의 ‘별을 헤는 밤“이 눈에 그려졌으며 산산이 부서진 이름을 허공 중에 불러보는 이의 마음이 내게도 전해서 나도 목이 쉬고 가슴이 절절해졌다.
시를 읽는 사람이 아름답다고 하는 말에 용기를 얻어 또 읽었다. 그 울림을 목소리에 실으라고 말씀하시니 해보았다. 아름답기 위해서, 한번 행복해보기 위해서 그렇게 이런저런 방법으로 시에 접근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에 시를 썼다. 내가 쓰는 것은 부끄럽게도 긴 글을 줄이고 그날의 감정을 정리 정리하는 정도다. 때론 사랑하는 이가 그리워 썼다. 쓰곤 울었다. 그리곤 나의 부족함에 좌절도 했다. 그렇게 낮이 오고 밤이 지나갔다. 그렇게 날이 지나자 별 관심 없던 시인들이 크게 보였다.
한 번은 잘 아는 정호승 시인의 “수선화에게”의 시를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를 “울지 마라 못하니까 나다”로 바꾸어 보았다. “산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를 ”산다는 것은 생긴 대로 사는 것이다 “로도 써놓곤 혼자 웃었다.
내가 뭐 시인인가? 늘 나 자신에게 위로와 변명으로 쓰는 것에 게으름을 피운다.
하지만 글쓰기에는 왕도가 없다고 자꾸 쓰면 된다고 말씀해 주시는 분이 곁에 있어 행복하다.
그래서 여전히 듣고 읽는 것에 접근한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나는 앞으로 자주 시간을 갖고 시를 써보기로 마음먹는다.
먼저 마음을 우선 가꾸고 정서를 더욱 순화시키는데 시간을 쏟아야 할 것 같다. 폭넓은 상상력을 키우리라.
또한 사물의 본질을 날카롭게 파악하는 힘을 길러야 할 것 같다.
무엇보다 시로 인해 나도 행복해지고 싶다.
나의 옆지기는 오래전 내게 이렇게 써주었다. ”자신이 선물인 줄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시의 제목은 ”선물’‘이었다. 아마도 나는 나도 시인인 것을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나도 시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