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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빛 바다에서

by 김인영


11월, 득량만을 끼고 있는 바다는 참 잔잔하였다.
한 달이 넘도록 기침을 하시며 거동이 불편하신 어머님을 뵈러 온다는 형제들과 함께 오랜만의 나들이를 결심하였다. 갈 곳을 물색하는 내게 친구가 지난여름을 보낸 곳이라며 추천해 주었다. 펜션의 이름이 너무 좋았고 거리도 가까운 곳이어서 더욱 좋았다. 바다.

겨울 바다를 만나러 간다. 그것도 폭풍 속 일렁이는 험한 바다가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바다 밑 세상도 투명하고 고요한 평화가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고운 이름 ‘은빛 바다’.

그 멋진 이름만으로도 조금은 지루하던 일상의 답답함에 지친 몸과 마음에 휴식을 줄 것 같았다.

그곳에서
이참에 보고 싶은 형제들과 이야기보따리도 풀고 어머니도 기쁘게 하리라 마음먹었다. 은빛 바다에선 세상 밖의 아름다움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 기대와 설렘을 가슴에 담고 난 며칠을 준비했다. 찰밥과 통팥이 듬뿍 들어간 떡도 준비하고 과일과 간식거리도 준비했다. 넘실대는 바다를 마주 보며 온천을 해야 하니 세면도구도 정리함에 넣고 붉은 일몰과 함께 사라지는 나를 상상하며 마음의 서정은 어느새 만삭의 여인이 되었다.

몇 년 전 바다에서 갓 건져 올린 굴을 숯불에 구워 먹던 경험을 되살려 바람 부는 시골 장에서 자루에 가득 담긴 신선한 굴을 사들여 곁들이리라 생각했다. 이것이야말로 자연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서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도착 후 점심으로 맛있는 한우삼합을 먹고 맑은 하늘 아래 노천 장을 기웃거리고 바닥에 펼쳐진 갖가지 나물들을 파시는 할머니들과 덤도 흥정하며 걷는 경험은 참 신선하였다. 기분 좋은 해수 온천욕을 끝내고 나니 어느새 깊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좁은 산길을 돌아 숙소에 도착했다.

서둘러 동생이 준비해 온 소시지와 삼겹살을 구워 저녁으로 먹었다.

남은 열로 군고구마를 구워 먹으며 나누었던 우리들의 귀한 초겨울 바닷가의 밤을 어찌 잊을 수가 있을까?

제철이 아직 아니라며 장흥정을 다 뒤져도 구할 수 없어 이루지 못한 굴 잔치가 많이 아쉽기는 했으나 더 깊은 겨울을 기다리는 수밖에는 없었다.


다행히도 기다림에 익숙지 않은 사람은 우리 가족 중엔 아무도 없었다.

눈부신 햇살을 받아 끝없이 펼쳐진 잔잔한 푸르고 맑은 은빛 바다는 이미 우리 모두에게 충분한 기쁨과 평안을 주고도 남았을까. 한 여름 폭풍 속을 헤쳐 나온 바다가 무언의 가르침으로 견디고 인내하며 나누는 법을 알려준 까닭이리라.
끝날 것 같지 않았던 지루한 여름도 제자리로 돌아가고 아직은 낙엽 밟는 소리가 좋은, 그래서 미처 저물지 않은 한 해를 준비하며 마감하기에 알맞은 때가 11월이 아닌가 싶다. 적당히 쌀쌀한 날씨는 게으름을 떨치고 일어나라는 듯싶고 다가올 겨울의 길고 매울 칼바람을 맞을 준비를 하라고 우리에게 여유의 시간을 주신 듯도 싶어 난 아직은 모든 그것이 사라지지 않은 11월이 좋다.


어머니의 심한 멀미로 계획대로 다 할 수는 없었지만, 여전히 웃음과 탄성이 이어지는 짧아서 아쉬운 일박의 여행을 끝내고 돌아오며 나는 한 소리를 들었다.
사람이 사는 거 뭐 별 겁니까? 내 속의 울림이 들려온다. ‘
사람이 사는 것은 특별한 것이다.’다른 내가 속삭인다.


때로 갈등의 길목에서, 때로 아픔의 절정에서,길을 가다

훗날 그것도 괜찮았다고 미소도 지으면서 그만해서 다행이라고 안도의 숨을 내쉬기도 할 것이다.

정답은 없다. 흐르는 시간만 있을 뿐
내게도 두 길이 있지 않았을까? 이젠 가지 않았던 길에 대한 미련은 없다.

하지만 궁금함은 여전히 있다. 잠시 생각해 본다. 앞으로의 길은 은빛 바다에 비친 그 하늘처럼 그냥 나 자신이면 되는 것 아닐까? 이제껏 함께 둥지 틀며 걸어온 동반자와 함께 남은 길을 가면 되는 것이다.

문정희 시인처럼 ‘겨울 사랑’을 하면 되는 것이다.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
머뭇거리지 말고
서성대지 말고
숨기지 말고
그냥 하얀 생애 속에 뛰어들어
따스한 겨울이 되고 싶다.
천년 백설이 되고 싶다.

은빛 바다는 내게 알려주었다. 우리 앞엔 사랑이 앞에 남아있다고
현대 절대로 머뭇거리지 말고 서성대지 말고 숨기지 말고 다가가라고.
겨울 밖에 안 남았을 내 인생의 커튼 뒤에 숨겨진 비밀 코드를 찾기 위해선 그것만이 최선이라고 잔잔한 바다 위에 은빛 글씨로 그렇게 새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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