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들이 모여 담소를 나누던 중 한 분이 살포시 내어놓은 그것은 해바라기씨였다. 거무스름하고 조금은 짭조름한 껍질을 까고 얌전히 속살을 내보이는 작은 녀석을 입에 넣으며 오랜만에 맛보는 씨앗에 우리는 모두 반가움을 표한다.
‘해바라기.’
이번 여름엔 보지 못하고 지나가는 듯싶다.
오늘은 내리는 비에 파묻혔는지 아침을 깨우던 매미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우주의 법칙과 원리로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은 결국 끝이 있으니 사라진 매미처럼. 들판을 황금빛으로 수놓은 해바라기도 곧 머리를 숙이며 자리를 내줄 것이다.
황금빛 해바라기가 무리 지어 피어있는 것을 볼 때면 삶의 기운을 받는 듯했다. 이국적인 모양의 그것. 어릴 적 집 마당의 해바라기는 키가 컸다. 그 때문인지 해바라기는 큰 것만 있는 줄 알았다. 담벼락을 나란히 지키고 있던 해바라기가 해를 따라 얼굴의 방향을 바꾼다는 것 또한 신기하기만 하였다. 해바라기를 숭배하던 고대문명 속 지금의 멕시코 지역에 존재했던 라틴아메리카의 사라진 아스텍인들의 모습이 스친다. 해바라기의 무엇이 그들을 신적인 존재로 추앙하게 했을까.
해바라기의 꽃말은 ‘희망’ ‘장수’ ‘건강’이라고 한다.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상징한다고 하니 더욱 친근하게 느껴진다. 정신적 질환으로 고생하던 화가인 ‘고흐’도 한때 남프랑스 ‘아를’의 노란 집에서 해바라기를 그리며 잠시 희망에 젖어 행복했다고 하지 않던가.
나이가 들어 이탈리아에서 스위스로 가는 길목에서 만난 해바라기 들판의 장엄한 경관은 경이로웠다. 사실 피자보다도 로마의 콜로세움보다도 은근히 그 광활한 꽃의 벌판을 기대했던 여행이었다.
소피아 로렌이 주인공이었던 영화 ‘해바라기’가 떠오르는 그 안타까운 운명의 해바라기는 우크라이나를 덮고 있다는 것을 오래전 들었지만, 지금관 달리 한국에서는 본 적이 없는 나는 꽃밭이라고 표현하기엔 조금 부족한 꽃의 바다와 같은 그 장엄한 풍경이 궁금하고 한 번쯤 보고 싶었다.
그날 창가에 스치며 지나치던 꽃밭의 감동이라니. 그때 나는생각했다. 아마 어릴 적 내 집응 지키던 해바라기 홀씨가 아주 조금씩 동에서 서로 날아와 그 순간 실로 오랜만에 그리움의 몫을 담아 한꺼번에 맞아주는 것이라고. 그래서 익숙했고 벅차며 코끝이 찡해왔다. 다른 모든 운명적 만남처럼 짧은 스침이었으나 내 가슴엔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아름다운 순간이 되었다.
꽃들은 제 운명을 탓하지 않는다. 꽃들은 비교하지 않는다. 꽃들은 존재 그 자체가 빛이다. 꽃은 어느 한 포기의 꽃도 울지 않는다. 울음을 보이지 않는다. 아픔을 속으로 키워 바람과 비에 젖어 피어난다. 해바라기도 그러하리라.
누가 꽃을 보며 인상을 찌그리겠는가. 꽃은 어린아이다. 꽃은 천국이다.
이름이 없어도 괜찮은 존재. 무명이어도 풀꽃이어도 상관없다.
산속이나 들판이나 돌 틈이나 잘 가꾸어진 정원 위의 꽃도 모두 자신의 몫이 있다. 혼자서도 피고 무리 지어 피며 타고난 운명대로 피었다. 진다. 불평 없이 살다 간다. 여름의 꽃 해바라기가 지고 있다.
태양을 향한 사랑을 목 놓아 외치는 소리가 잦아들고 있다.
오늘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