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북구 노원역에서 지하철을 내려 길 모퉁이를 도는데 눈에 뜨이는 상점이 있다. '이발소'라고 쓰여있는 이층 건물이다. 이른 시간인 탓인지 아직 영업 전인 듯 문이 닫혀있다. 틈 사이로 안을 스캔하여 보니 어두운 실내에 커다란 의자 하나가 의젓하게 자리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잊고 있던 아버지와 오빠가 턱에 비누거품을 바른 채 앉아 계신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큰 의자를 오르기 힘들어할 5살 손자 얼굴이 떠오른다
울 손자 에이든은 잘 생겼다. 적어도 우리 부부는 늘 자신 있게 말한다. 그 잘 생긴 외모가 더욱 빛날 때가 있는데 이발을 한 후 막대사탕 하나를 입에 물고 얼굴에 웃음을 띠며 이야기를 할 때면 분명 아이돌의 모습이 된다.
그 어린것의 목소리는 높은 음자리의 자유로운 노래이며, 손을 흔들며 안녕을 고하는 모습은 칼의 각도로 팬을 사로잡을 무대에 있어야 할 모습이다.
2살 때만 하여도 아기를 데리고 이발소에 가는 것은 넘어야 할 산처럼 힘든 일었음을 기억한다.
의자에 앉히는 일도, 목에 스카프를 두르는 일도 어려웠다. 미용사가 가위를 들고 다가오면 너무 심하게 우는 탓에 사례비에 얹어 주던 팁은 일상이었다. 나이가 들며 적응이 되어가니 실로 안심이 되고 기특하기 조차했다.
이발사는 영어로 바버(barber)라고 한다.
이발사의 역사는 실로 오래되어서 고대 법전인 함무라비 법전에 의하면 그들은 주로 노예들에게 표시를 남기는 일을 했다. 중세 서양과 중동에서는 대개 외과 의사나 목욕탕을 부업으로 했다고 한다. 당시 이발사 겸 외과 의사들은 고객의 이발과 면도는 물론 환자의 진찰. 사혈. 관장까지 많은 일을 했다고도 한다.
대한민국에서는 서양보다 뒤늦게 1895년 갑오개혁 당시 단발령이 내려진 뒤 대한제국 왕실에 최초의 이발사가 탄생되었으니 유교의 영향인 것을 잘 알고 있다.
이후 1980년대 까지 이발사가 이용원을 차리면서 명맥을 유지하다 퇴폐 이발소가 급증하며 2010년대 즈음부터 소위 '바버샵'이 급증했다.
이발사로 일하려면 자격증이 필요하며 자격으로는 이용사가 있다.
세월의 흐름과 함께 남녀의 구분이 없이 남자도 미장원에서 펌도 하고 염색과 커트도 하는 세상이 되었다. 헤어스타일리스트(hairstylist)라는 단어에 더욱 익숙해진 내 귀와 눈에 모퉁이 이발소가 신선한 충격인 아침이다.
나는 그곳을 지나며 생각해 본다
아침식사를 마친 바버 님께서 아래층으로 내려와 밤 사이 문 앞에 놓인 신문을 집어드며 신선한 공기를 들여 문을 활짝 열고 실내에 놓여 있는 화분에 물을 주고 음악을 듣는다.
그리고 들어서는 하루의 첫 번째 손님을 맞아 '로시니'의 '세빌리아의 이발사'처럼 재치와 유머로 한국판 ~'알마비바' 공작과 '로시나의 결혼을 성사시킨 이발사 '휘가로'가 될 수도 있다고. 오페라 '세빌리아의 이발사'가 한창 유행일 때는 음악의 성인으로 알려진' 베토벤'의 연주가 흥행에 실패했다는 것을 기억하며 아직 지지 않은 수국의 꽃밭을 걷는 날. 방금 지나친 이발소의 번영을 기원하며 걷는 오늘이 나의 꽃자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