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줄 (밥)
초겨울 문턱으로 들어가는 이른 저녁 너나없이 바빠 보이는 걸음들로 거리는 혼잡하다. 서로 엉키는 차들을 멀찍이 바라보며 유안진 시인의 `밥해주러 간다`를 떠올렸다. 혼잡한 도시의 삶에서 빵빵대며 지나가는 차들 사이로 허둥대며 적신호를 건너는 할머니. 그리고 놀라 소리치는 운전자. 나름 급한 일이 있다고 당당한 할머니. 늙은 할머니가 뭔 일이 그리 중요한 것이 있느냐는 더 큰 목청에 “취직 못 한 자식 밥해주는 거”라며 답하는 할머니. 두런두런 이어지는 할머니의 독백. “자슥 밥 먹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뭐냐”라고. 나도 시 속의 구경꾼들처럼 엄숙한 표정을 짓게 된다.
밥 먹는 일이 중요하긴 한가보다. 우리 속담에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고 하던가. 나이 들면 밥심으로 산다고도 한다. 생각해 보니 난 딸들과 통화를 할 때면 한 번도 음식 이야기를 하지 않고 지나갈 때가 없다. 오늘 저녁은 혹은 어제는 무엇으로 밥을 먹었느냐고 묻는다. 일이 고단하다고 말하면 어서 서둘러 들어가 밥을 먹으라고 하고, 남편도 잘 챙겨 먹여야 나이 들어 고생 안 한다고 말한다. 늦은 시간 집으로 돌아가며 샐러드를 주문해서 들어간다고 하면 하얀 김이 올라오는 따끈한 쌀밥에 밀리는 듯 왠지 저녁 식사는 아닌 것 같고 사위에게 미안한 생각이 가끔 들기도 한다. 주말에 한 주일 동안 먹을 국도 끓이고 밑반찬을 마련한다고 하는 날은 내가 뿌듯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내게 말씀하시던 어머니 판박이이다.
정성과 사랑이 깃든 상차림은 살아있는 것이 행복한 순간으로 다가온다면 조금은 과장일까? 언젠가 환자를 돌보느라 바쁜 의사를 딸로 둔 지인이 보여주던 예술 같던 그녀의 딸이 마련한 화려한 상차림에 기가 죽던 일이 기억난다. 시아버님을 위해 준비한 정성 어린 첫 번 생신 선물이라고 했다. 얼마 전 우리를 댁으로 초대해 주신 지인은 그날의 메뉴를 코스별로 적어 아름다운 꽃이 가득한 테이블 위에 놓아 맛난 음식과 함께 멋진 식탁으로 행복을 선물해주셨다.
나는 가끔 저녁상에서 밥을 먹으면서도 남편에게 오늘 점심 식사는 무엇이었냐고 묻곤한다.. 때로 삼시 세끼를 준비하는 것도 먹는 것도 부담되는 날이면 투정 삼아 하루 두 끼만 먹으면 좋겠다고 그러면 삶의 질이 더 나아질 것 같다고 말한 것이 불과 몇 년 전이다. 우리의 마음은 참으로 믿을 수 없는 것인가.
두레 밥상을 떠올리며 열 명도 함께 앉아 먹던 가족 밥상이 자꾸 줄어들더니 가족도 사라진다는 글을 읽고 가슴에 싸한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그 많던 싱아는 다 어디로 갔느냐고 말한 작가도 하늘로 가신 지 이미 오래되었다. 외출에서 돌아와 허겁지겁 밥을 안치고 대충 장만해서 함께 음식을 나누던 분을 그리워하며 생각이 부족했음을 반성하며 심히 부끄럽다. 가슴 한편으로 겨울바람이 분다. 나는 진수성찬이 아닌 소박하고 손맛도 떨어지는 상차림에조차 게으르고 인색했었다. 어머니의 사랑과 정성으로 가득찼던 그 날의 밥상이 그리운 날이다.
우물 속에서 기다리던 동아줄은 생명줄이었다. 생각해 보니 밥은 생명줄이다. 우리가 먹고 마시는 일상이 이미 축복의 한가운데인 것을 잠시 잊고 살았다. 우리는 흔히 밥은 곧 탄수화물(당질)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흰쌀 한 공기의 밥에는 약 4.5그램의 식물 단백질이 들어있다며 우리의 아름다운 피부에 이상적이라고 말하는 의사의 말에 수긍한다. 물론 잡곡을 섞어 먹는 것이 우리의 건강을 위해선 더욱 좋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다이어트는 가라 나이도 가라. 움직일 수 있는 날까지 전진 전진 하리라 밥상을 향하여. 세끼를 포기하지 않고 내가 살고 있는 날 동안 누군가를 위해서 밥상을 차리는 일에 게으름을 부리지 않겠다. 내가 더 이상 밥을 차리지 못하는 순간은 나도 밥상 한편에 자리를 잃는 날이지 않겠는가. 나의 자리에 꽃을 피우기 위하여 열심히 생명줄을 잡고 있으리라.
시인이 옳았다. 내게 귀한 일 중의 하나는 역시 밥해 먹이는 일이다. 밥해 먹이는 일은 영원한 사랑의 실천이다. 보라와 흰빛으로 설렘을 주는 영원한 사랑의 꽃말을 지닌 도라지꽃이 눈에 어린다. 어느새 깊은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