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화(墨畵)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김종삼·시인, 1921-1984)
잘 견뎌낸 여름을 지나 11월이 다가오도록 차마 떠나지 못하는 여름까지 잘라낸 오늘은 정말 춥단다.
대충 눈 비비고 일어나 차를 마시며 남편의 조끼를 걸친다. 잘 잤다. 따스함이 내 가슴에도 등 뒤에도 둥글게 둥글게 퍼져간다. 훈훈하다. 따뜻하다. 온유하다.~ 참 좋은 어휘다. 이제 긴장했던 어깨를 펴고 무장을 해제시키는 기분 좋은 말과 시간으로 남은 한 계절을 지키며 살 때가 아닌가.
그가 참 착하고 선한 사람이라면 우리는 'He has a heart of gold'라고 표현한다. 인성의 최고 표현을 금을 사용한다. 금은 초월의 빛이다. 고대 장인들에게는 금은 단순한 금속이 아닌 神性(신성)의 물질이었다.
시인이 바라본 검은 묵화를 나도 바라본다. 농촌에서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할머니의 따스한 눈길과 눈을 껌뻑대며 할머니를 바라보고 있을 그림이 상상된다. 서로 부었다고 안타까워하고 서로 적막하다며 쓰다듬는 사이.
작은 딸이 알레르기로 고생한다. 너무 힘들어 수업도 마치지 못하고 돌아와 쉬고 있는 엄마에게 저녁이 되자 다섯살 손자가 거실에 불을 켜며 걱정스레 묻는다. " 강한 불빛이 엄마에게 괜찮으냐고." 나는 또 감동한다. 이런 것이로구나. 따스함은 사랑과 배려에서 나온다는 것을 확인하고 생각을 정제할 틈이 없이. " 다음에 할머니가 무슨 선물을 사줄 거냐고 묻는다. 잘 모르겠다고 하더니 잠시 후 '관상용 물고기'라고 말한다.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오래 전 어머니의 외로움에 벗을 삼을 황금빛 금붕어를 사드린 적이 있었다. 한동안 볕이 드는 거실 의자에서 바라보시며 즐거워하시던 어머니의 손을 더 잡아 드리지 못한 것이 후회와 더불어 그리움으로 덧칠된다.
신문에 좋아하는 두 배우의 사진이 실렸다. 반가움에 큰 사진을 한참 쳐다 보았다. 어느새 80고개를 넘고 아카데미상을 거머쥐었던 두 명배우가 함께 손을 포개고 있다. 그들의 주름진 얼굴과 굵어진 손의 매듭 위에 세월이 보인다. 그리고 이렇게 쓰여있다.
/ Warmth was never about the outside / “따뜻함은 결코 외부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겨울용 운동복의 선전용 문구임이 분명하다. 나는, 우리는 안다. 한겨울 몰아치는 한파 속에서도 우리를 지켜줄 따스함의 진정한 구세주는 그들이 입고 있는 따뜻한 운동복이 아니다. 온기는 환경이 아니라 내면의 문제인 것이다. 결코 외부의 조건이 아니다. 따스한 말 한마디. 상대를 위한 배려 담긴 행동. 작은 나눔. 그리고 타인을 향한 눈 맞춤에 어린 미소. 마음 한 자락이면 우리는 다른 물질이 섞이지 않은 정금( 正金 ) 같은 사람이 되는 것 아닐까?
겨울의 문턱에 왔다. 추운 날 앙상한 가지 위로 비치는 햇살 아래서 누군가에, 무엇인가에 우리의 시선이 멈출 때 그들의 목덜미에 손을 얹고 따스함을 나누고 싶은 시간이다. 우리는 모두 외로운 존재가 아니던가. 종소리도 외로워 울려 퍼진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