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가는 날 1
입춘이 지났지만 코로나 바이러스로 얼어붙은 2월의 토요일이다. 결혼기념일이 다가온다. 며칠 전 나는 남편과 마스크를 쓰고 연극을 관람했다. 웃음 세례를 주는 연기자들의 멋진 연기 덕분에 오랜만에 유쾌한 시간을 갖었다.
우리는 그 밤 어머니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머니는 남편의 생일이 돌아오면 자주 세 번의 생일상을 차리시곤 했다. 음력에 한 번 양력에 한 번 그리고 생일 하루 전 날에도 맛있는 음식을 만드시며 최 서방 생일상이라고 말씀하셨다. 음식을 만드시는 것을 즐기시던 어머니이기에 늘 감사한 마음으로 정성스레 준비해 주시는 생일상을 즐기곤 했다. 그래서 우린 특별한 날이 돌아오면 가끔씩 삼시 세 판이라는 아리송한 단어를 들먹이며 세 번 즐기기로 게임 아닌 나름의 절차를 치루기도 한다.
그 두 번째의 기념 절차로 난 오늘의 투어를 남편에게 제안했다.
낙산 도성을 넘어 혜화문을 지나 산을 내려가 삼청동에서 브런치로 하루를 시작하기로 했다. 오전에는 깊이 들어오는 겨울의 햇살과 더불어 책도 읽고 느긋한 주말을 시작했다. 지난번 보아놓은 식욕을 자극하던 팬케익 하우스를 떠올리며 집을 나서 길을 건너고 돌계단도 숨차게 오르며 겨울 숲에서 빈 몸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나무에게 다가가 손도 내밀고 얼굴도 비비며 인사를 했다. 아직 이 자리에 그대로 있어 나를 만나 주어 반갑고 오늘도 숨 쉴 수 있는 만남이 더욱 고맙다며 인증숏도 찍는다. 시인은 말했다. 내가 서있는 자리가 꽃자리라고. 길 위의 만남은 생명이 있다고 했다.
숲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우린 마스크를 쓴 사람들 사이를 다시 걷는다. 텅 빈 도시에서 반갑게 맞아주는 여직원의 권유로 정말 맛있게 보이는 팬케이크 와 커피를 주문하곤 긴 기다림 끝에 만난 우리의 아침 겸 점심은 실망이었다. 생크림과 과일 그리고 멋진 블루베리 시럽과 아이스크림으로 한껏 치장한 세상 부드러운 팬케익을 맛보는 순간 낭패감을 느꼈다. 내게 온 그것은 나의 한 끼의 식사로는 양이 차지 않는 허리도 다리도 몸매도 날씬한 하늘하늘 코스모스 젊은이에게 어울릴 디저트용 수플레 팬케익이었다. 그저 팬 케이크이라는 사인만 보고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핫 하다는 디저트인 줄 모르고 빈 속에 아이스크림이 얹힌 부드럽기가 솜사탕 같은 케이크를 먹게 된 것이었다. 만만찮은 식사의 비용을 지불하고 나 보다 비위가 약한 남편은 물론 나 역시도 그 예쁘고 부드러운 접시 위의 유혹을 끝내지 못하고 다음에 디저트가 생각날 때 다시 오리라 말하고 서둘러 나왔다.
이미 시간은 오후 1시를 넘어 찬바람 맞으며 빈 속에 먹은 아이스크림으로 불편한 속을 간직한 채 우리의 신중하지 못함을 후회하며 근처 수제비 집으로 들어가 이미 자리한 많은 사람들 속에서 김이 나는 수제비로 허기를 채우고야 우린 웃을 수 있었다. 음식다운 음식을 먹었으니 다시 오던 숲길을 되돌아 집으로 가기로 하고 이젠 제대로 된 디저트를 맛봐야 한다며 오기가 반은 섞인 떼를 쓰는 어린아이처럼 찾아간 서울에서 둘째로 잘하는 집에서 진하고 달콤하고 김이 나는 단팥죽을 먹고 나오며 오늘은 거꾸로의 날이 아닌가 하며 웃었다.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길 산모퉁이 의자에 잠시 앉아 쉼을 가지며 문득 생각이 미친다. 나의 일상을 거꾸로 해보면 어떨까? 내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면 어떨까? 사랑을. 내가 먼저 해보면 어떨까? 용서를. 익숙한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 거꾸로 해보면 어떨까. 눈을 감자. 타인의 부족함과 경솔함과 너그럽지 못함을 보지 말자. 내 탓이려니 하자. 오늘 잠시 일어난 해프닝으로 난 웃을 수 있었다. 역 발상의 삶을 살아간다면 어쩌면 그것이 우리의 삶을 더욱 행복하게 해주지 않을까 싶다.
아직 남겨진 세 번째 이벤트가 기다려진다. 그날은 아주 멋진 날이 될 것이다. 이번엔 준비가 된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