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겨울 까만 창밖. 거실을 채운 희미한 빛. 어둠이 걷히면 서둘러 길을 나서리라. 미리 살펴 둔 지하철 노선을 다시 확인하고, 도착하면 연락하라는 남편의 당부를 들으며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인천을 향해 길을 나섰다.
연말이 되니 모임이 잦아지고, 오늘은 발걸음을 조금 더 멀리 내딛어 인천까지 오게 되었다. 내가 속한 문인들의 모임이다. 긴 세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문예지를 지켜 왔다는 발행인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아, 역시 문학에는 아름다운 삶이 있구나. 그리고 그 아름다움에 닿기까지 얼마나 많은 인내와 고독의 시간이 있었을까. 주변을 채운 선배들, 글쓰기의 맛과 멋을 아는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본다. 저들은 모두 나보다 깊고, 단단하고, 앞서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문득 생각했다. 나는 어떻게 이 문학의 세계에 들어서게 되었던가. 내게 글을 쓴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나는 지금 잘 가고 있는가. 축제의 장에 가득 찬 미소와 화려하게 놓인 꽃들 사이로, 내 머릿속에 작은 나비 한 마리가 잠시 날아올랐다. 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결과가 아니라, 서로 격려하며 더 나아가겠다는 약속일지도 모른다.
식사 자리가 이어지고, 자연스레 평범한 대화로 마음의 거리가 조금씩 좁혀졌다. 사는 곳이 어디인지, 어느 시간에 출발했는지 묻고, 음식 맛이 좋다고 웃으며 말하고, 커피와 다과를 함께 나누었다. 그저 작은 날갯짓 같은 이야기들이었다.
그중 한 분이 말했다. 몇 해 전 청계산 자락으로 집을 옮기고, 도서관 가까이에 살며, 도시의 소음을 피해 사색의 시간을 누리고 있다고. 그러면서 내게 물었다.
“밀른의 아카시아 길을 읽어 본 적 있으신가요?”
그 말이 오래 남았다. 그분의 삶 속에는 이미 아카시아 사유의 숲길이 흐르고 있는 듯했다. 오늘 모임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이 바로 그 한 문장이었다.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나는 위니 더 푸와 크리스토퍼 로빈을 떠올렸다. 같은 작가의 글이라는 사실이 새삼 흥미롭게 느껴졌다. 한참 사진을 바라보다가 문득 오래된 친구가 생각났다. 1950년대의 감성과 시간을 품고 있는 듯한, 늘 웃음이 잔잔한 사람이었다.그녀의 차 안에서 흔들리며 웃던 푸가 기억났다.
그녀는 휴대폰도, TV도 없다. 책과 영화, 뉴스는 오직 도서관에서 가져온다. 남편은 젊은 시절 마약 전과로 감옥에 있었고, 그녀는 그를 품고 살아냈다. 그리고 끝내 강이 보이는 조용한 집에서 천국 같은 작별을 했다. 지금도 고양이 다섯 마리와 함께 그 집을 지킨다. 생각해 보니 그녀에게서는 언제나 은은한 향기가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초여름을 익게 하는 아카시아 향기였을지 모른다.
밀른의 아카시아 길은 따뜻한 길이다. 호수가 보이는 숲길이리라 짐작한다.
숲길에서 햇빛은 나뭇잎 사이로 조용히 흘러내리고, '푸'는 그 빛 속에서 길을 찾을 줄 아는 듯 보였다.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는 듯, “오늘은 오늘의 걸음만 내딛으면 돼.”라고 말하듯이.
작은 발자국이 숲속 흙 위에 닿을 때마다 세상은 조금 더 부드러워지고, '로빈'은 생각했다. “행복은 아마, 누가 함께 걸어주는 순간일 거야.”
바람이 아카시아 가지를 흔들면 푸는 아주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세상은 늘 바쁘지만, 숲은 한 박자 늦게 숨을 쉬지.”
나만의 길에도 아카시아가 있다.
당신에게도, 남에게 보이지 않는 아카시아 길이 있을 것이다. 굳이 아카시아가 흐드러지게 핀 길이 아니어도 좋다. 길의 길이가 중요하지도 않다. 다만, 걸으며 사색할 수 있는 곳. 숨을 고르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 공간. 마음의 결이 고요히 정돈되고, 다시 한 걸음 내딛을 수 있는 길.
그 길 위에서 우리는 요동하는 마음을 다독이고, 허전함을 메우며, 서로의 향기를 나눈다. 그것이 어찌 행복이 아니겠는가.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아름다운 인생을 향한 몸짓 아닐까.
달력이 이제 마지막 장만을 남겨둔 날. 아카시아가 바람처럼 지나간 숲길을 떠올리니 문득 마음의 높이가 낮아지고, 시선의 결이 깊어진다. 그리고 그 속으로 느린 백색의 바람이 천천히 스며드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