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by 김인영




어머니는 말년의 삶에 가끔 말씀하셨다. 젊은 날, 나이 60이 되면 덕수궁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남자분이 있었다고. 인생의 긴 길을 걸으며 어머니는 약속을 못 지키셨을 것이 분명하니, 아마도 지키지 못한 약속이 아쉬움과 미안함으로 남아 있으셨으리라.

오래 전의 영화 '모정'을 다시 보았다. 사랑하는 연인은 그만 한국전쟁에서 사망한다. 다시 오겠노라고 약속하며 떠난 그이는 자신이 돌아와 기쁨을 나누는 대신 사망 통지서를 보냈다. 열렬하게 사랑을 나누었던 아름다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서 오열하는 여주인공이 너무 안타까웠다. 지키지 못한 약속이다.

인간이 타인과 앞으로의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미리 정하여 두는 것이 약속의 사전적 의미이다. 그러니 약속은 마땅히 지켜져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미리 정한 약속을 모두 지키고 사는 것이 쉽지 않음을 잘 안다. 개인과의 약속뿐만 아니라 소속된 사회적 규범을 어기며 사는 일도 다반사이다. 정치인들의 약속은 지키는 것보다 깨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거짓 약속은 씁쓸하다. 그로 인하여 신뢰가 사라지는 세상이, 상대를 믿지 못하는 날들이 안타깝기만 하다.

누군가는 이리 말했다.

"약속은 지킬 수 있는 것만 하라."

"약속은 말로 한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

문득 인생을 살아오는 동안 타인과의 약속은 차치하고라도 나 스스로와의 약속을 또 얼마나 많이 했는지 생각한다. 그것들은 얼마나 지켜졌을까?


철들 무렵 시인의 글을 접했다.

“‘사랑의 꽃씨를 마구 뿌리면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났을 때

그에게 보여 줄 것이 남지 않았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냐.“ 라고

쓰여 있었다. 그 글을 보며 나는 약속했다. 철없이.

‘한 사람만을 사랑하겠노라’라고.

그래서 결국 한 사람만을 선택하고 사랑하며 한 길을 걸어왔으니 조금은 답답하다고 싱거운 인생이라고 판단하여도 항변할 말은 없다.


1남 3녀의 다복한 우리 가정은 참 행복했다. 내가 판단하기엔 부모님은 세상살이에 그다지 부러운 것이 없었으리라 짐작한다. 유일한 아들이자 내겐 하나뿐인 오빠가 세상을 떠날 때까진. 일상에선 성실하고 부모님에겐 효자이었던 오빠였다.

몹쓸 병으로 생을 마감하며 내 손을 잡고 오라버니는 내게 말했다. ‘약속하자.’ 나는 오빠의 눈을 바라보며 오빠의 회한과 마음의 짐을 덜어 줄 것을 약속했다.

그 후 부모님을 당시 내가 살던 미국으로 초청하여 우린 함께 살았고 한국으로 돌아와 오랜 시간 서로를 격려하며 아름다운 날들을 함께 지내고 생을 마감하셨다. 약속을 지키는 삶이었다.


나는 생각한다. 삶의 길에는 항상 예기치 못한 변수가 있다. 그리고 이미 손가락을 걸며 맹세한 약속을 지키는 것에도 역시 타인의 도움과 이해가 필요하다. 나의 경우 긴 세월을 부모님과 한 공간에서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 가능했고 지난날들이 소중한 추억으로 기억되는 것은 서로에 대한 신뢰와 인내와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와 나의 짝이 된 남편.

학업을 계속하고 싶은 남편의 바람을 아는 나는 결심을 했다. 스스로에게 강해지자며 주문을 걸고 무사히 끝날 때까지 잘 견디겠다고 누구도 듣지 못할 약속을 했다.

밀월여행에서 허니문 베이비로 태어난 큰딸과, 작은딸을 선물로 받고 쉽지만은 않은 길을 걸어왔다. 결국 나는 약속을 지키고 남편은 하고 싶었던 공부를 오래전에 마치고 돌아와 자신의 분야에서 우뚝 서 있다.


이 글을 쓰며 다시 생각한다. 약속이란 제목으로 글을 쓸 수 있음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부족한 인생에서 지키지 못한 약속도 수없이 많았지만 돌아보면 약속을 지킬 수 있도록 해주신 부모님이 감사하고 부족한 부모 노릇에도 잘 자라 준 딸들이 고맙기만 하고 한 사람만을 사랑하겠노라고 철없이 약속한 그 마음을 변치 않게 곁에서 손잡아준 남편이 고맙기만 하다. 지켜진 약속 위에 보이는 오늘의 하늘은 더욱 높고 푸른 듯하다. 그래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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